하나님의 고통

성경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을 결코 냉혹하고 무정한 아버지라고 생각할 수 없게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깊이 느끼십니다! 어루만져주십니다.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사실, 그분은 우리 연약함을 만져주십니다 (히브리서 4:15절 참조).

하나님은 고통뿐만 아니라 슬픔도 느끼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셨던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 모습이 눈물 흘리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우리와 공감하시고 우리와 함께 우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컨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 (요한복음 14:9).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이 고통스러워하시는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군병들이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데려가기 위해 왔었습니다. 그분은 너무도 슬피 우셨으며 피가 눈물과 섞여 흘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로 고통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동산에서 왜 우셨는지, 왜 심령에 그러한 고통을 갖고 계셨는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분이 십자가를 지셔야 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잔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을 위해 전 인류의 오랜 세월을 내려다보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내려다보시면서 너무도 기막힌 일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값없이 주심과 완전한 구속을 부인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부인한 결과를 맞는 고통과 괴로움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피를 흘리며 그 고통을 겪을 것이나 너는 나를 부인할 것이다. 나는 심판 날 너와 함께 있을 것이며 너는 그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고 하시며 비통해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 우셨습니다. 그 사람들은 값없이 주시는 구속, 은혜, 축복, 기름 부음은 알고 있지만 이중 어느 것도 아직 그들 자신에겐 소용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구제할 수 있는 구제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길을 잃는 모습에 슬퍼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고통입니다! 이것은 인간 자신이 초래한 고통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고통을 십자가로 이끄셨습니다.

여기 뉴욕시에서, 우리는 신경질적이고 의기소침한 사람들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문 밖에 앉아있는 마약 중독자, 알코올 중독자 그리고 노숙자들을 쉽게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그들에게 선포되는 복음을 듣지만 대부분 이것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온갖 고통을 하나님의 눈으로 묘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이 모든 것, 즉 여러분의 고통, 나의 고통, 그를 부인하는 모든 사람들의 고통이 그에게 담당 지어졌습니다.

또한, 저는 예수님이 또 다른 이유로 마음의 비통함을 느끼셨다고 봅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자기를 조롱하고 비웃으며 자기를 술 주정꾼으로 만들 것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게다가 그분은 자신의 죽음을 부인하는 모든 사람들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마태복음 26:40) 고 말씀하실 때, 이것은 비통함으로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제자들을 꾸짖기보다는 오히려 그들 육신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슬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연약함이 자신에게 담당 지어진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바로 다음절에서 예수님은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41절) 고 하셨습니다. 전지 전능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를 버리고 달아나리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제자들이 그를 부인한 후 무가치하고 고통 속에서 보내며 전에 어부로 지냈던 이전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리란 것도 아셨습니다.

그분은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하리란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한때 담대했던 제자가 "내가 예수님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런 끔찍한 짓을 할 수 있었을까? 하며 언덕으로 도망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내가 기도하는 동안 한 사람의 친구가 필요하구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가 나와 함께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자기 곁에 누군가가 필요하거나 용기를 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로 인해 고통스러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와 함께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다면, 너는 준비되지 않은 것이며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너무 게을러서 대비하지 못하면서 그들 마음속에 생겨나는 변절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일어나는 고통은 예수님의 마음에 커다란 고통으로 안겨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에 대해 슬퍼하지 않으셨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 친구여, 너의 일을 하라"고 하시면서도 그분의 속으로는 유다를 그냥 가도록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보다는 예수님은 유다가 자신을 배반하려고 다락방에서 나올 때 속으로 우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전지하신 예수님은 그 제자가 "나는 살아있는 하나님을 배반했어"라고 부르짖으며 은화 삼십을 땅바닥에 집어던질 것이라는 것을 아셨으며 고통스러워하는 유다가 목매어 죽을 때 그 사람의 비통함을 느끼셨습니다.

최근 제게 주님의 어떤 것을 알게 해 주신 것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기를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매번 하나님께 죄를 짓습니다, 그분의 공의는 자신의 자녀들을 징계하십니다. 그러나 자신의 율법을 어긴 사람들에 대해 심판하시는 것이 하나님께는 가장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에스겔 18:32).

하나님은 "사람들이 죽을 때 - 심지어 사악한 사람이 죽을 때 -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절대 아니다! 나는 어떤 죄인의 타락도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나는 배반자에게 일어날 일들을 보노라!"고 하시며 의기양양해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마약 밀매자 또는 낙태 의사, 심지어 살인자의 죽음이나 파멸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어떤 사람이 죄로 죽을 때 행복해 하지 않으십니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와 주님이 얼마나 다른지요! 우리는 손뼉을 치며 말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 당신은 그 사악한 자를 다루셨습니다." 우리는 한 명의 죄인이 죽을 때 하나님이 전혀 고통스러워하시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그러나 하나님께서 잠언 1장 26절에 '나는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하고 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발췌문의 본문은 20절에서 시작합니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20 - 22절). 지혜는 26절에서도 여전히 부르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의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조롱하는 지혜가 하는 말입니다. 이 구절은 지혜를 져버리고 지혜의 조언을 조롱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입니다. 지혜를 부르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원칙의 법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빨간 불일 때 차들이 지나가는 횡단보도를 건넌다면, 가로등에 나타나는 지혜는 여러분의 불행을 조롱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의 불행과 재난에 대해 즐거워하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가장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분은 그들의 죄로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을 조롱하지 않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에게 어떠한 죄인의 죽음도 즐겨하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여전히 그분의 지혜는 모든 사람들에게 외쳐지고 있습니다. 타임 스퀘어 교회를 나서자마자 보이는 길거리에서도 외쳐지고 있습니다. 지혜를 조롱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하는 사람들은 심판 날 지혜로부터 조롱 당할 것입니다. 그 때에, 지혜는 "정말 바보 같구나!"하고 소리칠 것입니다. "그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28절).

잠언의 1장은 또한 여전히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구절에서 1장은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직 나를 듣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 (33절).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보며 눈물을 흘리셨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또 다른 고통을 봅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9:41-44).

여기서 누가 울고있습니까?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 바로 예수님 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적이 와서 너희의 아내와 자녀들을 죽일 것이다"라고 비난하고 소리치며 비누 상자 위에 서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예언하셨을 때 우셨습니다. 그분은 디도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입해서 성을 강탈하고 성전을 파괴하는 40년 뒤를 보셨습니다. 그것은 참사 중에서도 참으로 대 참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사건을 예견하셨을 때, 이 성으로 인해 우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사는 사람들은 주님을 부인했으며 침을 뱉고 조롱하고 욕설을 퍼부어 대고 주의 이름을 저주하고 십자가에 못박을 것입니다. 여기에 계신 주님은 그들에 대한 고통으로 여전히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심판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공의는 이방 군대로 하여금 그들의 거리를 누비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아이들은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은 또한 예루살렘이 겪게 될 하나님의 재앙에 대해 눈물을 흘리고 계시다고 봅니다. 그들은 축복, 용서와 새 마음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모든 것을 거절했습니다! 다음절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도 고통스러워 하셨는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5-46절).

예수님은 채찍을 휘두르시며 성전 안으로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왜 이렇게 심하게 내몰았습니까? 그분은 이것이 다가올 심판을 재촉하는 매우 엄한 죄임을 아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일어날 무시무시한 상황에 대해 고통스러워 하셨습니다. 주님은 칼에 찔려 울부짖는 여인들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디도 군대의 발 밑에 짓밟혀진 어린아이들의 절규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성전이 허물어져 버린 돌 더미를 보셨기 때문에 눈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예견하셨으며 "장사하는 너희가 이해하지 못하겠느냐? 여기서 네가 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택된 백성들로 인해 괴로워 하셨습니다. 그들의 죄가 그들을 파멸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채찍질 하셨을 때 그분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었습니다. 저는 그 성전 안에 있던 어떤 누구를 때렸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 대신, 바람을 가르며 책상과 수레를 내리쳤을 것입니다. 그분은 사랑의 매질로 채찍을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분이 "일어나라! 너는 하나님을 너무 고통스럽게 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통스러워하시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 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출애굽기 32:7-14).

이 본문을 읽으면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릇되게도 하나님보다 모세에게 은혜와 자비를 더 돌립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진멸 하시려고 하셨지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자비를 베푸실 것을 간청했잖아."라고 생각합니다.

아무 것도 진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모세가 이 본문에서처럼 기도할 수 있었다는 한 가지 이유만 있을 뿐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자비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듯이, 하나님은 여기서 자신의 공의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공의는 사람들을 진멸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들을 진멸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하는지를 알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백성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이시여, 주님의 공의가 무엇이고 주께서 공의를 나타내셔야 한다는 것을 아오나 목이 곧은 이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변론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주님. 주님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신다는 것을! 10,000 이나 12,000명을 진멸하실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수가 많을수록 주님은 더욱 고통스러워하실 것을 압니다. 주님의 마음을 압니다 - 그리고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기에 진멸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압니다!"

성경은 말하길, 하나님이 후회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치시고자 하신 자신의 마음을 바꾸셨다는 의미입니다. 그 대신, 백성들은 광야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결코 자비를 옮기지 않으셨습니다. 백성들이 자신들의 믿음 없음으로 주님의 마음을 38년이 넘도록 계속해서 아프게 해도, 주님은 여전히 그들을 죽는 날까지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먹이시고 입히셨습니다.

욥이 고난을 겪을 때, 저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지를 봅니다!

저는 주님이 욥을 보고 "이제 그만, 됐다! 나의 종이 이런 무시무시한 고통을 더 이상 겪게 할 수 없다. 고통을 멈추게 하겠다!"고 말씀하실 것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릅니다.

욥이 겪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얼마나 고통스러워하셨는지 아실 것입니다. 제 생각에 하나님께서 "욥, 이것을 통과해야만 해, 그리고 내가 너의 잃은 모든 것을 다시 주겠다. 견고하여라, 내가 네게 한배 반으로 갚아주겠다." 마침내, 욥이 이겨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에게 모든 것을 두 배로 주겠노라. 네가 전에 가졌던 것보다 두 배나 더 많게 하겠노라!"

우리는 또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계수한 다윗에게 공의를 내리셔야했을 때의 고통을 봅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백성의 숫자를 계수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육신의 힘에 의지하려는 유혹에 미혹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셨던 일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괘씸히 여기사 이스라엘을 치시매" (역대상 21:7).

하나님은 다윗을 치셨습니다. 왕은 스스로 용맹스런 군사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는 자만심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자를 보내셔서 온역으로 이스라엘을 치셨습니다. 곧바로 목이 곧은 백성들은 파리처럼 죽어갔습니다.

다윗은 전갈 자들로부터 헤브론에서 10,000명이 죽고 벤자민에서 5,000명, 유다에서 6,000명이 죽었다는 무시무시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죽은 자의 숫자는 자꾸 늘어만 갔습니다.

오래지 않아 70,000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었습니다. 멸하는 사자는 땅 위 아래를 왔다갔다하면서 백성들을 죽게 했으며 이제 사자는 예루살렘을 멸하기 위해 칼을 빼어든 채 예루살렘에 서있었습니다. 다윗의 나머지 용사들은 모두 진멸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자만에 마음이 무척 상하셨습니다. 그분은 다윗을 구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시길:

"...다윗이 장로들과 더불어 굵은 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16절).

다윗이 이스라엘내의 죽은 자들에 대해 들었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울부짖었습니다, "오 주님, 이 자가 범죄 하였나이다! 이 백성은 죄가 없나이다. 제발 주님, 그들을 용서하시고 이 자를 치옵소서!"

하나님은 다윗의 고통을 더 이상 두고 보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사자에게 이르셨습니다. "됐다! 이제는 네 검을 거두어라. 내가 너무도 고통스럽구나!"

"사자를 명하시매 저가 칼을 집에 꽂았더라" (27절).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계속해서 치게 한다면, 내가 무시무시한 고통을 겪고 있는 다윗을 볼 수가 없구나. 다윗은 마음이 상하여 죽을 것이야!"

여기 하나님의 고통스러운 마음의 굉장한 모습이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울부짖었지만 하나님의 공의는 징계를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는 아직도 징계를 받고 있느냐?"고 하시며 비웃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의 눈물은 하나님의 부드러운 마음에 닿았습니다! 주님은 다윗의 고통을 느끼셨으며 그의 약함을 아시고 만져주셨습니다. 그리고 "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고 우리가 범한 죄를 심판하실 때, 우리는 주님께 "이중의 고통"을 안겨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끔찍한 "이중의 고통"의 첫 번째는 주님의 빛과 사랑에 대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죄를 범할 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죄 자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분이 우리의 계속적으로 짓게되는 죄를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아십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를 비탄과 불행으로 몰고 갈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너무나도 아프게 합니다.

하나님의 "이중의 고통"의 두 번째는 우리의 죄를 심판 받을 때 그분이 자신의 말씀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징계하실 때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참으셔야 했고 우리의 비탄에 빠진 부르짖음을 들으셔야 합니다 -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품이 생겨나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얼마 전에, 저는 난감함에 빠졌었습니다. 저는 저와 타임 스퀘어 교회에서 사역하시는 협동 목사님에 대해 비방하고 험담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것은 무섭고도 마음을 아프게 하는 소문들이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무슨 일을 했다고 말하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저를 너무도 아프게 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기기 시작했습니다.

  •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 (잠언 19:9).
  •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에 귀를 기울이느니라" (17:4).
  •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11:13).
  • "궤휼로 그 감정을 감출지라도 그 악이 회중 앞에 드러나리라" (26:26).

얼마 후, 저는 절망에 빠져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습니다. "오 하나님, 이것이 언제나 지나가겠나이까? 거짓말은 너무도 많은 것을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날마다 무엇을 하는지조차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것과 싸울 힘이 없습니다. 주님은 저의 피난처이십니다, 주님 -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주님이 자신의 자녀의 원수를 갚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이 공의를 행하시는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제발 주님 - 주님이 행하시기 전에 제가 이 고통을 얼마나 더 받아야 되는지요?"

제게 오는 이 모든 비난에 대해 생각할 때, 저를 괴롭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성직자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동역자와 가족 그리고 심지어는 친구들까지 동원시켜 모함하고 대적시키는 사탄의 방해로 무시무시한 시련을 견디고 있는 참으로 많은 의인들이 있습니다.

저는 "왜지요, 주님?" "주님의 공의는 어디 갔습니까? 주님은 왜 계속해서 주님의 자녀를 아프게 하시는지요? 공의를 나타내시는데 왜 그토록 오래 기다리십니까?"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데이빗, 나의 공의를 나타내는 것이 내게 고통스럽기 때문에 자비롭고 오래 참으며 노하기를 더디 하느니라. 네가 나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너는 결코 내가 심판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내가 왜 심판하는데 그렇게도 오래 기다리는지를 이해할 것이다!"라고 응답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게 주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를 범하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심판에 대한 무서운 장면을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거짓 소문과 험담을 계속 하는 사람들에게 임하게 될 것에 있습니다.

저를 압박하는 어느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징계가 임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부르짖기를 "오 주님, 나의 유익을 위해서 심판하지 마옵소서! 나를 아프게 하는 그런 사람들에게조차 부디 그리하지 마옵소서. 제가 옳다고 주장하지 않게 하옵소서!"

저는 심판하기를 내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아마도 15분 가량 제 안에 계속되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데이빗, 네가 네 자녀를 사랑하므로 네 자녀를 벌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 것이다. 이것은 내게도 마찬가지란다. 심판하는 것이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벌하는 것이 내게는 고통스럽구나!"

마침내, 하나님은 제게 저를 벌하셔야 하는 매순간 참고 견디시는 주님의 고통을 보게 하셨습니다!

저는 주님으로부터 아주 엄히 벌을 받아야 했던 4, 5차례의 경우를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저는 "하나님, 고통스럽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어떤 것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데이빗, 나 또한 이것을 다시금 겪고 싶지 않았다. 네가 아프게 하는 것을 견뎌야 하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내켜하지 않았다. 나는 이것을 좋아하지 않는단다. 이것은 나를 슬프게 한단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받아야 하는 아픔이구나!"

하나님은 제가 다른 사람이 징계를 받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렵게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다른 사람을 벌하실 때 좋아하는 그런 그리스도인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잠언 24:17).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을 볼 때 좋아하지도 말며 주가 심판하실 때 하나님의 고통을 함께 느끼십시오! 여러분은 단순히 그리스도가 비탄에 잠기기전 그가 채찍을 치시면서 우시는 주님 앞에서 좋아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에 여러분의 마음도 아파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하나님, 충분합니다! 부디 제발 주님의 사자가 그의 검을 거두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울부짖어야 합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인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히브리서 12:11).

하나님은 여기서 우리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마음에 대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분의 징계는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슬프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징계하실 때도 주님은 자신의 자녀들 곁에 계십니다. 그분은 잇따라서 채찍질을 하시기 때문에, 마지막 채찍질이 눈물이 나게 하는지 어떤지를 보시고자 기다리십니다. 그분은 회개와 비탄의 아주 작은 표시라도 찾으십니다. 그리고 처음보이는 하나의 암시만으로도 징계를 그치십니다! 그분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어하십니다, "됐다! - 그 이상의 것은 없다! 이것은 내게 너무 고통스럽구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고통의 문제를 이해하고 주님께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이러한 생각으로 가득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 주님, 저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은 거리에 있는 가장 사악하고 지독한 죄인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그런 사람도 사랑하신다면,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 스스로 당신의 원수가 된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더 많이 사랑하시겠습니까?

아마도 여러분은 지금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서 얼마나 멀리 멀어져 있을까 하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아직도 많이 배워야 합니다. 그분은 심판하시기를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사악한 자의 멸절을 기뻐하지도 않으시며 자신의 자녀들을 징계하시는 것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반대로 이것은 너무나도 주님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미가 7:18-19).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십시오. 그분은 자비를 베푸시기를 즐겨하십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