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을 흔드는 기도

다니엘서가 쓰여졌을 때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있었습니다. 6장에 이르면 오랜 세월 공직생활을 한 다니엘은 80세가 되어 있습니다. 경건한 선지자이자 설교자인 그는 그가 섬겼던 두 명의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과 벨사살이 죽은 후에도 살아 있었습니다. 이제 다니엘은 다리오왕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수십 년 공직에 있는 동안 다니엘은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노인이 되어서도 기도를 쉬거나 늦출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성경에는 다니엘이 지쳤다거나 낙심했다는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그가 돈을 적립해 놓았다가 한적한 시골에 오두막을 사서 노년을 아무 할 일 없이 보냈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반대로 다니엘은 이제 막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팔십이 되었지만 다니엘의 기도가 지옥을 흔들며 마귀의 분노를 일으켰다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무렵 다리오 왕은 다니엘을 나라의 최고위직에 앉혔습니다. 다니엘은 이제 전국 약 120여 도의 방백들을 다스리는 세 명의 총리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다리오왕이 다른 두 명의 총리보다 다니엘을 더 총애했다고까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리오왕은 다니엘에게 국가정책을 수립하고 장관 임명자들과 박사들을 가르치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방백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단 6:3).

다니엘은 분명 아주 바쁜 선지자였음에 틀림없습니다. 극도로 바쁘지 않고서야 그런 엄청난 임무를 수행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그저 이 총리에게 가해지는 압력과 바쁜 일정, 해도해도 끝이 없는 회의가 어떠할 지를 상상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다니엘에게서 기도의 시간을 빼앗아 가지는 못했습니다. 기도는 여전히 그 어떤 임무보다도 우선순위를 가진 그의 중심 사명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다니엘은 바빠서 기도를 못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루 세 번 그는 주님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총리로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의무와 짐, 그리고 요구 사항들을 떠났습니다.

다니엘은 자신의 소명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 지를 "성공한" 지도자와 상담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수많은 백성들을 어떻게 섬겨야 할 지 알기 위해 세미나에 참석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자신의 모든 활동에서 물러선 다음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다니엘은 모든 지혜와 인도, 말씀 그리고 예언을 무릎을 꿇고 있는 동안 받았습니다.

저는 다니엘이 위기의 때에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에게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가 된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느부갓네살 왕이 통치하던 그의 젊은 시절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느부갓네살 왕은 불길한 꿈을 꾸고 당황, 혼돈, 고뇌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자기 수하의 술사들에게 그 꿈을 해석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아무도 할 수 없었습니다.

왕은 노발대발했습니다. 그는 신하들에게 "너희들은 내게 어리석고 공허한 말밖에는 하지 못하는구나. 너희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시간만 끌고 있어. 하지만 나는 진실을 원한다. 나는 내가 찾고 있는 바로 그 대답을 듣고 싶다." 마침내 그는 모든 영매들, 즉 점성술사, 박수, 술객, 심지어 젊은 다니엘과 세 명의 경건한 그의 친구들을 포함한 "박사"들까지 모두 죽이라는 영을 내렸습니다.

다니엘은 이 사형 집행령이 내려진 것을 알았을 때 그의 세 친구들과 모였습니다. 이 모임이 다른 대안을 찾아보려 한다거나, 살아날 방도를 생각해 낼만한 다른 유대인이 없는지 알아보려 하거나, 사교적인 모임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얼마나 놀라운 기도를 드렸는지 모릅니다. "영원무궁히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권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그는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자에게 총명을 주시는도다. 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 데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단 2:20-22).

이 당시 구약의 교회는 최악의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찬송을 잃어버렸습니다. 경배하는 소리도 들을 수 없었고 영적으로는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바벨론의 엄청난 번영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사단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상태를 보고는 기뻐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단은 느부갓네살의 마음을 움직여 다니엘을 죽이라는 법령을 공포했습니다.

그 때 모든 이스라엘 포로들은 다니엘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운명은 다니엘이 하나님과 교제하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아무에게도 말씀하시지 않는가? 이 시대를 읽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는 자가 없단 말인가? 주님의 비밀을 분별할 수 있는 자가 있겠는가?"라고 그들은 의심했습니다.

다니엘은 정확히 사태를 파악했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대처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정당한 대우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고 왕궁 앞에서 그 시위를 벌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군중, 시위, 사람의 수가 세상에든 지옥에든 별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거대한 건물과 교인 수를 자랑하는 초대형 교회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어떤 설교가 듣기 거북하세요? 여러분들이 교회에 오실 수 있도록 저희가 해 드릴 일은 없을까요?"라는 질문을 하면서 이에 답하기 위해 여론 조사와 통계를 사용하는 젊고 똑똑한 학벌 좋은 목사들에 의해서도 사단이나 세상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이 영향을 받는 유일한 비결은 마음의 비밀과 숨겨진 죄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골수를 쪼개며 불안한 마음의 외침에 응답하는 순전한 성령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저는 느부갓네살 왕이 "나에게는 힘과 권세가 있어. 그러나 나에게는 평안이 없어. 나는 의문스러운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야. 그 대답이 필요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하는 너희들, 지식인, 영매, 심지어 성직자들까지도 해답을 갈망하는 내 마음의 외침에 답하지 못한다면 존재할 가치가 없어. 너희들은 이 땅에 있을 이유가 없어. 너희는 이 사회에 쓸모없는 자들이야."라고 외치는 현대를 사는 인류를 묘사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최근에 달라스를 방문하고 있을 때 저는 "공동체 교회"라고 선전하는 한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 교회의 예배는 너무 멋대로여서 불경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예배 중에 어른들은 음료수를 마시면서 도너츠를 어적어적 씹고 있었고 아이들은 미친 듯이 뛰어 다녔습니다.

예배는 자동차를 사는 법에 관한 웃기는 연극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배 인도자들은 "혼합형" 찬양, 애인에게 부를 만한 사랑 노래를 몇 곡 불렀습니다. 드디어 박사학위를 가진 목사가 손에 설교를 적은 종이 쪽지 한 장을 들고 강단에 올라섰습니다. 그는 약 10분 동안 자기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 법에 관해 이야기 했습니다.

이러한 사역은 주변 사람들에게 교회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묻는 설문조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예배는 완전히 세상과 타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예배당에 모인 사람들을 쭉 둘러보았을 때 저는 틀림없이 해결해야만 하는 깊은 문제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십대 아이들은 지루해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의 마음은 이 사람들로 인해 무척 아팠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하늘로부터 온 말씀을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받은 것은 지푸라기만도 못한 것이었습니다. 왜일까요? 강단에 서 있는 목사들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고 주저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손가락이 미국에 분명하게 나타나면 사람들은 더 이상 "모든 게 좋아질 겁니다."라고 주장하는 성공지향적 목사들을 더 이상 찾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처럼 다니엘과 그 친구들 같은 경건한, 시대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들을 찾아 다닐 것입니다.

다니엘서 5장에 보면 느부갓네살의 아들 벨사살이 왕위에 올라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 왕은 수천명의 귀인들을 위해서 성대한 연회를 열어주었습니다. 축제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자 왕은 신하들에게 예루살렘 유대인의 성전에서 가져온 금잔, 은잔을 가져오라고 시켰습니다. 곧 벨사살의 귀인들과, 왕후, 빈궁들은 이 성스러운 잔을 가지고 술을 퍼 마셔댔습니다.

갑자기 어느 순간 초자연적으로 손 하나가 연회장에 나타나서 그 손가락으로 벽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글의 내용은 심판이 임박했다는 경고였습니다. 성경은 "그러자 왕의 안색이 변하였다. 그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번민하였다. 그의 다리가 풀리고 무릎이 떨려 서로 부딪힐 지경이었다. 왕은 점성술사들과 점쟁이들을 불러 들였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왕이 크게 소리하여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를 불러오게 하고 바벨론 박사들에게 일러 가로되 무론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옷을 입히고 금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그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때에 왕의 박사가 다 들어왔으나 능히 그 글자를 읽지 못하며 그 해석을 왕께 알게 하지 못하는지라 그러므로 벨사살 왕이 크게 번민하여 그 낯빛이 변하였고 귀인들도 다 놀라니라" (단 5:7-9).

얼마나 겁에 질린 모습입니까! 그러나 번영하는 미국이 머지않아 어느날 갑자기 똑같은 충격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글은 벽에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심판이 임박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벨사살 왕과 같이 미국의 지도자들은 번민할 것입니다. 그들의 안색이 변하고 무릎이 떨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인데도 미국의 목회자들은 거짓 평안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전국에 걸쳐 세상과 타협한 목자들은 미국이 아주 많은 선교사를 전 세계에 파송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결코 이 나라를 파멸시키지 않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모든 목사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기도하는 자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도우시기 원합니다. 사악하고 쾌락만을 쫓는 이 시대에 당신은 완전히 주님으로만 둘러싸여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가락과 심판의 말씀이 나타나서 당신의 양들이 시대를 분별해 달라고 요청할 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면 강단에서 얼마나 농담을 할 수 있겠습니까? "목사님, 어찌 된 일인지 얘기 좀 해 주세요. 이것이 심판인가요? 다음엔 무슨 일이 있을까요? 왜 저희에게 이런 일을 경고해 주시지 않았죠? 모든 일이 잘 될 거라고 하셨잖아요. 근데 저희는 모든 것을 잃었어요."라고 사람들이 당신의 설교를 가로막고 외칠 때 당신은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저는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설문조사를 볼 때마다 계속해서 충격을 받습니다. "현대적인" 예배가 풍요로운 때인 지금은 효과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손가락이 나타날 때, 사람들의 은행 계좌에 돈이 점점 줄어들 때, 자녀들이 마약에 빠져들 때, 가정이 깨어질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십시오. 그때 양들은 솜사탕 같은 설교는 들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순전한, 세상의 것은 전혀 섞이지 않은 진리의 말씀을 원할 것입니다.

벨사살 왕궁 전체가 이런 갑작스런 사태에 두려워 떨었습니다. 아무도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돌연 파티는 중단되었습니다. 그리고 왕이 두려워 떨자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왕의 나라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 곧 왕의 부친 때에 있던 자로서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있어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라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세워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의 어른을 삼으셨으니 왕이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이 다니엘의 마음이 민첩하고 지식과 총명이 있어 능히 꿈을 해석하며 은밀한 말을 밝히며 의문을 파할 수 있었음이라 이제 다니엘을 부르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그 해석을 알려 드리리이다"(단 5:11-12).

그래서 벨사살은 다니엘을 소환했습니다. 그는 다니엘 선지자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네게 자주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너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단 5:16).

다니엘은 듣기 좋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리를 이야기 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무릎을 꿇고 기도해왔으며 이 사람들이 무엇을 들어야만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습니다.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단 5:22-23, 26-27).

이것이 바로 벨사살과 귀인들이 듣기 원했던 바로 그 퇴색되지 않은 진리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정확하게 이야기해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의문스러워 하는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진리였습니다. 벨사살은 진심으로 감사했으며 다니엘을 국가의 최고 통치자로 임명했습니다.

자, 이제 저에게 아직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죄에 대한 단호한 설교를 원치 않는다는 말 따위는 하지 마십시오.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기도하는 자들은 지옥의 입장에서는 골칫거리입니다. 그리고 사단은 기도를 막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짓을 다 벌입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과 벨사살왕의 통치 시에 자신의 기도가 얼마나 효력을 발휘하는지 입증한 바 있습니다. 이제 다리오 왕 재임 하에서 사단은 다니엘의 기도를 막기 위한 거대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선지자의 기도가 지옥을 너무나도 흔들었기에 화가 난 마귀는 다니엘을 쓰러뜨리기 위해 바벨론 정부 전체를 동원했습니다.

다니엘이 그 나라에서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높은 자리에 늘 임명됐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정치가들은 다니엘에게서 지혜, 존경심, 왕의 총애를 보았고 이를 시기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다니엘을 대적해서 모함을 꾸몄습니다. "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단 6:4).

다니엘에게는 흠이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정치가들은 단 한가지 죄목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다니엘에게 찾아낼 수 있는 죄목이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그 틈을 얻지 못하면 그를 고소할 수 없으리라"(단 6:5). 오늘날 우리들에 관해 이런 이야기가 하나님께 들려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정치가들은 다니엘이 하루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니엘이 총애를 받는 이유가 이 기도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기도를 멈추게 할 계획을 실행했습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저는 그들이 기도할 시간이 없도록 다니엘을 바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니엘과 같은 총리 중 한 사람은 중요하면서도 총리로서 관여할만한 일에 다니엘을 끌어들였습니다. 너무 바빠서 다니엘이 기도할 시간이 없도록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단이 성도들에게 사용하는 주된 장치 중 하나입니다. 특별히 목회자들에게 널리 퍼져있는 음모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목사님에게 왜 기도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시간이 없어서라고 답할 것입니다. 목자로서의 역할에 대한 요구가 너무나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서 목사님들이 남는 시간은 아마도 설교 준비하는데 다 써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또한 같은 유혹에 말려듭니다. 사람들은 "기도할 시간이 너무 없어요. 일하다 보면 시간이 전혀 안나요."라고 이야기 합니다. 주부들도 그렇습니다. "낮에는 기도할 틈조차 없어요. 애들 옷 입혀서 학교 보내고, 집 청소하고, 식사준비하고 하다 보면 남는 시간이 없어요."

소렌 키에르케가드라는 철학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분주함은 마약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는 분주함은 결국 두 마음을 품게 한다고 언급했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더 분주함 속으로 깊이 빠져들수록 진리에 대한 사랑은 점점 더 까마득히 사라져 갑니다. 해야 하는 일들에 점점 더 자극을 받고 시간에 대한 요구가 점점 더 증가하면서 자신이 어떤 위험에 처해있는지를 깨닫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은 있지만 그 거울에 뭐가 비치는지 볼만큼도 거울 앞에 서 있을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기도할 수 없을 만큼 바쁜 사람이 죽을 병에 걸린 사람보다 더 심각한 지경에 있다고 믿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점점 더 자기 상태에 익숙해져 갑니다. 따라서 점점 더 기도도 안하게 되고 하나님도 의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확신은 점점 더 희미해져서 나중에는 완전히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기도 없이는 자신이 하루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동료들이 더 많은 일을 그에게 쏟아 붓듯 할 때도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여러분도 그 다음 줄거리는 잘 아실 것입니다. 그들은 마침내 30일 동안 기도를 금지하는 법령을 공표했습니다. 그것은 다니엘 한 사람을 겨냥한 법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조차도 다니엘은 지옥을 흔드는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사자굴에 갇혔습니다.

다니엘이 도대체 어떤 동기로 그토록 열심히 기도했는지 의아해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형 언도가 바로 코밑에 닥쳐온 상황에서도 다니엘로 하여금 계속해서 기도하게 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84세의 노인은 그 시대의 교회들도 더 이상 찾지 않는 하나님께 왜 그의 마음을 그다지도 격렬히 쏟아 붓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일까요?

다니엘이 기도에 자신을 드리기 위해서 드렸을 노고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그의 시대에 현재의 뉴욕과 같은 도시, 크고 웅장하며 부유한 바벨론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술취함, 쾌락추구, 탐욕으로 특징지어지는 영적 무감각의 시대에 살았습니다.

다니엘을 포함해서 그 누구에게도 기도는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는 것은 시작하기는 쉽지만 지속하기는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우리의 육과 마귀는 기도를 방해할 음모를 합작해서 꾸밉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예레미야 5장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렘 5:1).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 요점은 "나를 찾는 단 한 사람 만이라도 발견한다면 긍휼을 베풀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완전히 축복하시고 보호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도덕적 선을 넘어 간음하며 창녀와 놀아났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더 이상 죄로 인해 슬퍼하지 않았으며 고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단 한 명의 상한 마음을 가지고 중보의 자리에 설 기도하는 자를 찾으셨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에스겔 23장은 비슷한 비극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와 제사장들은 약탈하는 늑대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무고한 영혼들의 것, 가난한 자와 과부들의 것을 도둑질함으로써 부유해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모욕했으며 정결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죄에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거짓말로 설교를 하고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고 거짓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항할 한 사람을 찾으려는 하나님의 노력은 헛수고였습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겔 22:30).

하지만 바벨론 유수 동안 하나님은 그런 한 사람, 다니엘을 찾으셨습니다. 오늘날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주님은 그런 경건한 남종과 여종을 찾고 계십니다. 주님은 기꺼이 기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역사, 즉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설" 신실한 종들을 찾고 계십니다.

다니엘처럼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손에 쥐고 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다니엘에게 임하셨을 때 다니엘 선지자는 예레미야서를 읽는 중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구원의 때가 이르렀다고 성령께서 계시하신 것이 바로 이 때였습니다. 계시가 임하자 다니엘은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자시여"(단 9:3-4).

하나님의 영은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자들을 찾아 각 나라와 교회 그리고 목사들의 설교를 살피고 계십니다. 그런 종들은 성경적 지식만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 능력, 죄의 소멸, 자유케 하는 진리를 찾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하기 때문에 분명히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의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백성들을 찾으시기만 하면 기도의 영으로 축복해 주십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회복시킬 때가 되었음을 알았을 때 분명 흥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보았을 때 다니엘 선지자는 슬퍼했습니다. 백성들은 바벨론의 죄에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쾌락과 부를 찾고 예전에 가졌던 고결한 도덕적 기준에서 멀리 유랑하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회복과 부흥을 받을만한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자기 백성들에게 그들의 죄를 호되게 꾸짖었습니까? 아닙니다. 다니엘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도덕적 타락을 자신의 타락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주여 수욕이 우리에게 돌아오고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단 9:5,8)라고 그는 선포했습니다.

저는 오늘날의 교회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상태는 전혀 하나님께서 열망하시는 우리 안의 위대한 부흥의 역사에 화답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처럼 우리는 우리의 악한 사회의 죄로 인해 오염되었습니다. 다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캘리포니아에서는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동성애를 공인된 생활방식 중의 하나로 인정하도록 가르치는 것을 의무화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난잡한 술파티가 대학 캠퍼스에서부터 고등학교와 중학교에까지 확산되었습니다. 인터넷은 음란물을 전하는 고속도로가 되었습니다. 거의 30여 년 전쯤 저는 저의 책 "비젼"에서 전자 박스가 악한 음란물들을 우리의 가정으로 들일 것이라는 사실을 예견했었습니다. 그것은 비디오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오늘날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활동의 90%는 음란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지금 현대의 바벨론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죄된 행실들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저희 사역팀은 정기적으로 크리스찬 부인들로부터 이런 편지를 받습니다. "저는 제 남편이 저로부터 멀어져 간다고 느꼈어요. 저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죠.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서재에 들어갔을 때 저는 남편이 인터넷 음란물에 열중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젊은이들은 특별히 사단의 책략에 쉽게 말려드는 먹이감입니다. 십대 그리스도인 중 수없이 많은 아이들이 냅스터라는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서 악한 음악을 내려 받고 있습니다. 저는 십대의 자기 아이가 인터넷에서 도대체 무얼 내려 받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을 배웠던 신실한 한 어머니를 알고 있습니다. 아들의 컴퓨터 파일을 열었을 때 그녀는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녀가 발견한 것은 살인범 찰스 맨슨의 노래, 경찰관을 죽이는 내용을 담은 노래, 죽음, 자살, 그리고 각종 난잡한 성관계를 다루는 노래들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자기 백성을 축복하시기를 간절히 열망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이 이 세상의 영으로 오염돼 있다면 우리는 그의 축복을 받을 자세를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다음과 같은 강력한 선언을 합니다. "…이 모든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였사오나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은총을 간구치 아니하였나이다.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재앙을 간직하여 두셨다가 우리에게 임하게 하셨사오니…"(단 9:13-14).

다니엘이 말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에서 일어나는 도덕적 타락을 다 보았습니다. 우리의 목자들이 자기의 이익만을 좇고 찾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사회 전체가 멸망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기만 했더라면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돌이키게 해 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시며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은혜로운 약속까지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전혀 시간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우리는 그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갔고 이 악한 세상의 죄에 흠뻑 물들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에게 임하는 이유입니다."

"지옥을 흔드는 기도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실 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기도는 자신의 나라와 교회가 점점 더 죄에 깊이 빠져드는 것을 보는 신실하며 부지런한 종들에게서 나옵니다. 이러한 자는 무릎을 꿇고 부르짖습니다. "주님, 저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속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로 하여금 사악한 시대 한 가운데 당신의 능력을 지키는 본보기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무도 기도하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기도하겠습니다."

다니엘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짓습니다. "곧 내가 말하여 기도할 때에…가브리엘이…내게 이르더니…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나왔나니…이제 네게 고하러 왔느니라 너는 큰 은총을 입은 자라"(단 9:21-23).

오늘날 하나님의 집에서 기도하는 자들이 어디 있습니까? 밤낮으로 주를 찾는 신실한 목자들이 어디 있습니까? 이러한 사람들은 큰 은총을 입음으로 지혜와 총명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다니엘처럼 이러한 종들은 자기 나라와 교회의 죄를 자신의 죄와 동일시하며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그리고 겸손히 외칩니다. "오, 주님, 제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보여주시옵소서. 제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옵소서. 제가 그것을 대면해서 처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언제나 무릎을 꿇게 해 주시옵소서. 주님의 교회가 회복되는 것을 보기를 갈망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