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임사역

David Wilkerson

교회 역사의 초기에 커다란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그 끔찍한 시기에 사도 요한은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보내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로마황제는 네로나 도미티안 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요한을 밧모섬으로 추방했습니다. 밧모섬은 작고 외진, 인적 없는 황량한 섬이었습니다. 전 주민이라고 해봐야 죽을 때까지 그 섬에서 살도록 추방당한 몇몇 죄수들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처럼 요한은 밧모섬으로 추방당했으며 거기서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사랑하셨던 바로 그 "애제자 요한" 입니다. 그는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그리스도의 품에 자신의 머리를 기댔던 바로 그 요한입니다. 그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의 형제이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담긴 세편의 서신서와 더불어 네 번째 복음서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요한이 밧모섬에 다다랐을 때를 그려보십시오. 그는 배에서 외딴 섬에 내리고 있습니다. 나무도 없고 모래 사장만이 보일 뿐입니다. 그에게 보이는 사람이라곤 몇 명의 누더기를 걸친, 무뚝뚝해 보이고, 저주스러운 욕설을 내뱉는 죄수들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죽음이라는 운명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곳에서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요한의 등 뒤에서는 선원들이 아마도 쌀, 밀가루 등의 아주 기본적인 식료품 원료가 든 몇몇 음식 상자를 해변에 내동댕이치다시피 하고는 다시 배에 올라 다리를 걷어올립니다. 그리고는 천천히 바다 멀리 사라집니다.

요한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배를 바라봅니다. 그는 일생에 다시 그 배를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는 이제 남은 생애를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채 보내야 하는 귀양살이 신세에 꼼짝달싹할 수 없는 버려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계시록 1:9).

예수의 비천한 제자에 불과한 요한은 왜 그런 형을 받게 되었을까요? 왜 세계를 지배하는 강대국 로마는 그를 문명세계로부터 고립시키기에 그토록 필사적이었을까요? 요한은 로마 제국 안의 땅에서 감옥에 갇힐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왜 로마황제는 그의 입을 봉하려고 했을까요? 로마가 요한을 위험인물로 간주한 것이 분명합니다. 요한이 유대인과 이방인들 가운데 아주 유명인사 였다는 것은 명백했습니다. 요한이 엄청난 영향력과 효과적인 사역을 그들에게 펼쳤음이 분명합니다.

죄수선이 멀리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이제 요한은 자신이 증거 했던 말이 자신에게 일어났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 한 것을 기억 나게 하려 함이요"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가르쳤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요한복음 16:2-4).

밧모섬에서 요한이 얼마나 많은 밤을 추위에 떨면서, 혹은 비에 젖어야만 했겠습니까? 지중해의 악명 높은 폭풍우로 인해 비에 흠뻑 젖어 뼈 속까지 시리는 추위에 얼마나 자주 시달려야 했겠습니까? 비를 피할 오두막이라도 하나 있었을까요? 아니면 갈아입을 옷이라도 한 벌 있었을까요? 얼마나 자주 감기와 질병과 싸워야 했겠습니까? 음식은 또 어떤 것을 먹었을까요? 쌀 몇 부대 정도일까요? 죄수선이 다시 올 때까지 버티기 위해 그것도 아껴 먹어야만 했을까요? 빈약한 영양을 채우기 위해 뱀이나 도마뱀을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까요?

이 세상의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요한은 인생의 실패자였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본다면 이렇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게 무슨 낭비야. 하나님께서 왜 전대미문의 가장 기름부음이 넘치는 사람을 이렇게 내버려두시지? 왜 하나님께서 헌신 된 제자를 원시적 상태에서 굶주리게 하시는 거지? 요한이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지 않았다는 것도 이해를 못하겠어. 예수님께서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요한복음 16:23-24)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한 사람이 요한이잖아. 요한의 믿음은 도대체 어디로 간거야?"

이번에는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슬프게도 그들은 요한을 성공의 기준으로 측량할 것입니다. 그에게 모여드는 회중도 없고, 교회 건물도 없고, 건물을 빌리거나 살 돈도 없는 존재라고 말입니다. 돌아다닐 차도, 집도, 설교할 때 입을 정장 한 벌 없는 존재, 사역의 계획, 도시 선교나 열방을 얻고자 하는 계획도 없는 존재. 오늘날의 지도자들은 일고의 가치도 없이 요한을 실패자로 간주할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잖아. 끝장이군. 이런 사람이 어떻게 사역으로 부르심을 받았지?"

이 얼마나 잘못된 견해입니까! 밧모섬에서의 첫번째 안식일 날 요한은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 교회를 "나 요한의 교회"라 불렀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계시록 1:9-10). 달리 표현하자면 요한은 "나는 문명세계로부터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저와 함께할 형제, 자매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의 성령에 감동되었습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요한이 그 고립된 섬에서 드렸던 찬양은 수천의 입술로 드려지는 거룩한 경배의 음성과 동일하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밧모섬에서의 처음 며칠 이후 요한에게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전 세계의 교회에 영원히 영향을 끼칠 결정을 하나 내렸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자신이 세웠던 사역의 모든 계획과 생각들이 죽었던 것입니다.

요한의 생각에 밧모섬으로의 추방은 그의 마지막 운명이었습니다. 그는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아마 여기서 남은 일생동안 꼼짝할 수 없겠지. 그러나 하나님의 불은 잊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 비록 나 혼자라 할지라도 나는 주님을 찬양하겠노라. 회중이 없고 형제, 자매와의 교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성령 안에 거할 것이다. 그리고 내 자신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데 바칠 것이다. 이제 나는 그 어느 때 보다도 하나님을 알아갈 시간을 갖게 되었다."

요한은 완전한 고립 속에서 주님을 온전히 찾았습니다. 그는 성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산 제사로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요한은 이제 전임사역(full-time ministry)에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점에서 전임사역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요한이 자신에게 오직 하나님만을 전부로 여겼다는 점에서 전임(full-time)인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밧모섬에서는 재정을 모으거나, 표어를 내걸거나, 과장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른 사역자와 경쟁하거나 남보다 더 큰 교회 건물을 세울 필요도 없었습니다. 요한을 칭송하거나, 그에게 축하를 보내거나, 그를 자랑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유일한 초점, 단일 사역,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축소되었습니다. 그것이 요한이 가지고 있던 전부였습니다. 그는 "기도와 경배, 주님과의 교통함이 제게 필요한 모든 것입니다."라고 진심으로 말하였습니다.

전임사역(full-time ministry)이란 무엇입니까?

전임사역이란 단순히 한 교회의 목회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전도자로 전국을 돌아다니거나 부흥집회를 여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전임사역이란 학위나 신학교 졸업증명서, 혹은 교단에서 제공하는 목사안수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커다란 교회의 목회자로 재직하면서 전임사역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수백 번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여러분을 하나님 보시기에 전임사역자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제게 와서 주님께서 자신을 전임사역자로 보내시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런 분들은 대부분 직업을 갖고 있는 평신도들입니다. 어떤 분들은 진심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전임사역가운데로 부르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기 직업에 만족을 못하거나 지루하다고 느낄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괜찮은 보수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그들에게 매력적인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일에 파트타임으로 관여하면서도 전임으로 섬기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이 있습니다. 사실상 회중들이 목사님의 생계를 후원할 수 없기 때문에 목사님들이 세상에서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의 나라에서 허다합니다. 후원을 받는다 해도 대부분은 부족합니다. 그 목사님들은 충분한 재정적인 지원만 받는다면 자신들의 사역이 훨씬 더 효과적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해 동안 그들은 하나님께 간청하고 있습니다. "언제 제게 문이 열리게 될까요?"

저는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이 전임사역에 관계되기를 열망하신다고 믿습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주님께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전임사역이 봉급을 받는 자리나 직업이라는 생각을 지워 버려야만 합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전임 사역이란 주님을 섬기는 사역(ministry unto the Lord, himself)인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여러분은 사도 요한과 같이 무인도에 홀로 떨어져서도 전임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저는 요한을 성경 인물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사역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전임 사역자가 될 준비가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먼저 여러분은 사람의 칭찬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과제나, 계획, 혹 어떤 큰 프로젝트에 관여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보증서나 신임장 같은 것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회중이나 교회 건물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만족시킬 유일한 사역은 주님께 드리는 기도와 경배 뿐입니다. 위대한 목사로 존경을 받기 보다는 찬양으로 주님께 제사를 드리며 주님과 홀로 있기를 택할 것입니다. 사람들을 향한 사역은 주님을 향한 사역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의 나의 소명은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라는 유일한 소명 가운데 자신을 완전히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하나님의 시야에 합당한 전임사역에 준비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전임사역자라 불리는 많은 설교자들이 주님의 시야에는 전혀 사역자가 아닙니다.

저는 목사로서 월급을 받으면서도 주님을 섬기지 않는 설교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께로부터 오는 짐을 지지 않습니다. 기도 가운데 주님을 부지런히 찾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설교할 말씀을 받지도 않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다른 설교자들로부터 자신이 할 설교를 차용합니다. 그런 목사들은 단순히 일한 대가로 돈을 받는 피고용인일 뿐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신선한 말씀도, 기도도 그들에게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저는 동시에 자신의 목회자보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훨씬 더 깊은 평신도들도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을 섬기는 대가로 한푼의 월급도 받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국에 전임 사역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중보자이며, 진리에 굶주리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도에 자신을 드려 그리스도께 집중합니다. 이들은 진정한 사역자이며 오래 전에 자신의 목회자보다 훨씬 더 성장했습니다. 실상, 그들의 목회자는 주께로부터 버림받은 자이거나 전혀 하나님의 사역자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밧모섬의 요한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요한이 그 섬에서 다른 사람과 접촉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소수의 죄수가 있었다 해도 그렇게 경건한 자와 어울리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요한은 교제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상의할 사람도,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에게 들리는 것이라고는 철썩거리는 파도소리와 갈매기의 울음소리 뿐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웬만한 사람은 미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성령의 음성에 의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는 성령에 의지하여 안식과 보호를 구했습니다. 요한이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계시록 1:10)라고 증거 했을 때 그가 본질적으로 이야기하는 바는 이런 것입니다. "나는 성령께 완전히 복종했습니다.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내가 계시록에 기록한 아시아에 있는 교회의 부패상을 보여주신 분도 바로 성령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지구상에 일어날 모든 것을 내게 보여주셨습니다."

그의 전임사역 가운데 요한은 실로 높임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계시를 받았습니다.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계시록 4:1-2).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늘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요한과 같이 우리는 "이리로 올라오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히브리서 4:16). 보좌 앞으로 나아오라는 이 부르심은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에게 대부분 무시되어 왔습니다. 진정 하나님의 음성을 아는 성도들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로서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 역시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저는 오늘날의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이 자신에게 밧모섬의 경험을 스스로 부과할 남종과 여종이라고 믿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텔레비전을 보거나, 인터넷 정보를 검색하면서 쇼핑을 할 시간을 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오는 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네가 만약 이리로 올라온다면, 나의 자비와 은혜를 네게 계시해주겠다. 네가 나를 찾기 때문에 전에는 본적 없는 것들을 너에게 보여주겠다."

사람의 프로그램과 모든 육적인 목소리를 제쳐둘 전임 사역자들이 어디 있습니까? 누가 자신의 야망에서 돌이켜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인도 하심과 통치하심을 받겠습니까? 누가 자신을 사역의 유일한 초점, 성령 안에 거하고 사는 것에만 집중함으로 다른 사람들이 인간적 기준에서 자신을 앞질러 가는 것을 내버려두겠습니까?

요한의 고립은 세속의 사람들에 의해서 강제로 부과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느 때든지 우리가 기꺼이 우리 자신을 주님과 함께하는 "귀양살이"에 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이것은 보이는 사역을 내동댕이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직업을 버리거나, 가족을 버리거나, 전도하는 일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바쁜 사람으로 살아가면서도 밧모섬의 경험을 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훼방하는 모든 목소리와 활동을 제쳐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자신을 하나의 초점, ‘나는 사람의 소리를 듣는가, 아니면 성령의 음성을 듣는가?’에 맞추는 것입니다.

일단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일한 초점이 되시면 우리는 하늘로부터 임하는 분별력과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만 초점을 맞춘 제가 보낸 "밧모섬의 시간" 에서 발견한 것들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그 마음의 두려움으로 인해 쓰러질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누가복음 21:26) 저는 그 시간이 곧 오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미국과 전세계의 수많은 무리의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마비시켜 다가올 공포를 스스로가 느끼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현혹시키려 노력해서 더 이상 두려운 뉴스를 접할 필요가 없게 할 것입니다.

바로 지금, 특별히 뉴욕과 이스라엘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불면으로 고통 당하고 있습니다. 이곳 뉴욕에서는 공포감으로 인해 밤새 뜬눈으로 지새우는 수천, 수만의 사람들 때문에 시 전역에 걸쳐 병원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성경말씀에 따르면 최악의 사태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관한 계시를 희미하게나마 받았을 때 그들 모두는 전율했습니다.

저는 경제적 붕괴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믿습니다. 지난 2년간 7조 달러 이상이 주식시장에서 증발해버렸습니다. 잠시 동안 주가가 올라갈 수는 있겠으나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소비 경쟁은 끝이 날 것입니다. 신용카드 빚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파산할 것입니다. 사방에서 지난 날의 풍요를 생각하며 눈물과 통곡이 있을 것입니다.

부동산 거품 역시 곧 터질 것입니다. 시장은 팔려는 사람들 뿐이요 사려는 사람은 전무할 것입니다. 벌써부터 주식 폭락으로 인해 파산 지경에 이른 사람들이 값비싼 저택들을 매물로 내놓고 있습니다. 뉴저지 주의 한 건축업자는 주인이 제게 재정적으로 극심한 타격을 입어서 가구 한 채도 들여놓지 못한 채 매물로 내놓은 백만 불에 가까운 신축 저택에 관해 이야기해 준 바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두려운 것은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세계는 곧 수소폭탄 전쟁이라는 두려움의 벼랑에서 떨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전 세계의 모든 지도자들이 두려워 떨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가려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는 반드시 이 시대에 관한 진리를 들어야만 합니다. 마귀의 영이 지구상에 풀려날 것입니다. 공포의 사건들이 증폭되자 성도들은 자신들을 공포에 무감각하게 만들려 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신앙이 없는 자와 같이 술과 마약으로 공포를 잊으려 할 것입니다. 또 다른 이들은 자신을 각종 성적 유희 가운데 넘겨줄 것입니다. 사탄은 이미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서 엄청난 양의 타락의 재료를 공급해 왔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완고함이 생길 것입니다.

계시록 16장 9절에서 요한은 끔찍한 타는 듯한 열이 지구가운데 임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계시록 16:9). 이러한 자들은 너무나 무감각해져서 구원 받기를 거절할 것입니다. 도리어 그들은 지옥을 선호할 것입니다.

주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데 참여하는 자들 중 일부는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다가오는 시대에 소극적이고 미지근한 성도들은 양심의 화인을 맞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항하는 완고함은 아닙니다. 그들은 일종의 경건함을 유지하고 자신이 안전하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 느낌이 없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차례로 두려움이나, 놀람, 영원에 대한 관심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장이 멈출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사탄에게 쉬운 목표물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나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설명한 바 있습니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에베소서 4:18-19). 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해석해 보면 "그들은 냉담해 져서 감정도, 죄의식도 없이 죽어 있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의 것에 대해 무관심해 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깨어나 주님을 구하라는 모든 부르심을 무시합니다.

이러한 성도들은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범사에 자라도록" 훈계를 받아왔습니다(에베소서 4:15). 바울은 그들이 교회를 대적하여 개시되는 사단의 마지막 공격에 대항하는데 필요한 내적인 힘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생명의 흐름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음탕함으로 마비시키는 것을 택했습니다. 무지가운데 행하기를 선택함으로 그들은 위험한 상황에 대한 자신의 지각력을 마비시켰습니다.

이러한 현혹 속에서 그들은 어떤 두려운 소식도 다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지구상에 급작스럽게 임하는 공포를 대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달려가는 대신 그들은 가능한 모든 성적 쾌락, 탐욕과 사악함에 자신을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에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바울과 같이 저는 성도 여러분 모두, 특히 젊은이들에게 촉구하는 바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에 대해 미지근하거나 냉담해졌다면 깨어나십시오. 성령의 불이 여러분의 삶을 떠나지 않도록 하십시오. 성령의 나팔 소리를 들으십시오. 주님을 섬기는 전임사역자가 되어 전심으로 주님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앞으로 있을 시험의 때를 감당할 그리스도의 능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드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든지 아니면 바울이 설명하는 자들과 같이 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무지 가운데 계속해서 거한다면 모든 감각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것에 대한 관심은 갖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구상 최악의 죄인이 되어 여러분이 전혀 가능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 악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미 그리스도인 가운데서 이러한 최면, 마비 과정이 일어나고 있다는 징후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미친 듯이 닥치는 대로 신용카드를 긁으며 쇼핑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능력으로 갚아 나갈 수 없는 집을 삽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점점 더 깊은 빚더미 가운데 빠져들어 갑니다. 그들의 논리는 세상의 논리와 같습니다. "만약 모든 것이 붕괴된다면 우리는 같이 무너지겠죠. 그렇다면 즐길 수 있을 때 즐겨 야죠."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시대를 인식하고 있지 못합니다. 바로 지금 미국의 삼분의 일은 가뭄을 겪고 있습니다. 여러 주에서 산불이 엄청난 땅덩어리를 태워 삼키고 있습니다. 원래 비가 내리지 않는 텍사스의 주요 도시들을 포함해서 방대한 지역에서는 홍수가 휩쓸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례 없는 기후변화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메시지를 이해하고 있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성공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 회개 없는 얄팍한 복음으로 회중을 사려고 하는 타협한 목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도와주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릴 때 그러한 자들을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강대상으로 몰려가 사태를 설명해 달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일이죠, 목사님? 모든 것이 다 잘 될 거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우리를 잘못 인도해 오신 것 아닌가요?" 교회는 문을 닫을 것이고 성도들은 흩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거짓 가르침 때문에 자신을 스스로 마비시켰던 모든 현혹된 영혼들에 대한 책임을 그 목회자들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911 이후 사람들은 교회로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6개월이 채 안돼 다시 떠나갔습니다.

사람들은 테러 사태의 여파 속에서 교회를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소망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하늘로부터 임한 한 마디의 말씀도 듣지 못했으며 상처 받은 영혼을 위한 위로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설교를 하는 목사들 중 많은 자들이 그들과 똑같이 하나님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그 목사들 대부분은 기도하지 않는, 세속적인 목자이며 진정한 사역자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끔찍한 테러가 일어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일단 한번 속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음 번 테러가 일어나 그들의 마음이 끔찍한 재앙으로 놀랄 때 그들은 소망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에 스스로를 마비시킬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마비시키기 위해 방탕함을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상 그 두려움, 고통, 절망가운데 빠진 자들은 죽음 자체와 계약을 맺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언약을 심판으로 인해 두려워 떠는 에브라임을 묘사하는 이사야 28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취한 자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이여…쇠잔해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같이 파괴하는 광풍같이 큰물의 창일함 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인하여 옆 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이상을 그릇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너희 말이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음부와 맹약하였은즉…하는 도다"(이사야 28:1-15).

제가 말하고 있는 마비란 이런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음부(지옥)에 우리를 내줬어요. 우리는 이미 거기 있는 것과 같아요"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그들은 심판의 두려운 소식에 자신을 마비시켰습니다. 이사야는 "그 전하는 도를 깨닫는 것이 오직 두려움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이사야 28:19).

우리가 대면하는 끔찍한 사건들은 우리의 상상을 완전히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에브라임과 같이 그들은 자신을 마비시켜서 지옥을 그들의 운명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되나요?"라고 묻고 싶은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가 이 구절에서 언급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주목해 보십시오. 그는 전능자 여호와를 따르는 성도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들이 음부와 언약을 맺는 것입니까? 그들은 타락했으며 세상의 더러운 것들에 오염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음란함으로 인해 영적으로 눈멀었습니다. 그래서 심판이 임하자 그들은 너무나 무감각해서 지옥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임으로 섬기는 사역자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이사야 28:16). 세상이 공포와 불안가운데 당황할 때 하나님의 전임 사역자들은 안식 가운데 거할 것입니다. 주님은 폭풍 속에서 그들의 요새가 되어주시며 흔들리지 않는 바위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자신을 주님 안에 숨기는 모든 자들은 위험으로부터 안전할 것입니다.

그날에 그리스도께서는 그 백성들에게 자신이 그들의 모든 것, 구원자, 보호자, 지키시는 이, 폭풍 속의 소망 되심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실 것입니다. 세상이 음부와 언약을 맺는 동안 우리는 그리스도와 언약을 맺을 것입니다. 심판이 우리의 사방에 임하려고 할 때 우리는 평안 가운데 거할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이미 천국에 있는 것으로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이사야 28:16). 이 구절의 히브리 원어의 의미는 "그는 두려워 하거나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아무것도 우리를 흔들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 가운데서 이끄신 것과 똑같이 우리를 이끄실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기쁜 소식 한가지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밧모섬에 거하던 어느 날 요한은 배 한 척이 그 섬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배가 도착했을 때 요한은 로마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제 사도 요한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배에 올라 그의 귀양살이를 뒤로 하고 항해를 떠났습니다. 그리고는 에베소에 도착했습니다. 그때부터 요한의 글은 세상에 기름 부으심을 받은 등불이 되었습니다. 요한이 사랑이라는 주제에 관해 교회들에게 세편의 서신서를 쓴 것이 밧모섬에서 나온 다음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 헌신 된 종에게 그의 고난의 때를 통해서 가르치신 것이었습니다. 사랑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다가오는 시대에 고난을 당할까요? 예,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요한을 무너뜨릴 수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 대적이 그의 거룩한 남은 자들을 파괴토록 허락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전임 사역자들의 교회를 세우고 계십니다. 모든 폭풍 속에서도 주님 안에 서 있을 자들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