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누가복음 17장의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쓴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십자가를 지실 때가 가까워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접경지대를 지나실 때,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마을의 옆을 지나가게 되는데, 그 마을 밖으로는 10명의 문둥병자들이 지저분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함께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 아홉은 분명 유대인이었고 한 명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는 같이 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상종조차 하지 않았지요. 분명히 이들 열 명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그 질병으로부터 오는 아픔이 이들을 한 곳에 모여 의지하며 살도록 하였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문둥병에 대해서 공부해 본 적이 있으시다면 이들이 살아가는 그 더럽고 지저분한 모습을 상상하실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는 '뉴욕의 문둥병자들'의 모습을 보아도 혐오스럽게 느끼실 것입니다. 링컨터널 입구 근처의 41번 가에는 임시로 만든 헛간 같은 집들이 도시의 한 블록을 차지하며 뻗어있습니다. 냉장고 박스에 넝마를 올린 - 두터운 종이판지 집들이 대부분이지요. 불결하고 더러운 매트리스들, 남루하다 못해 찢겨진 옷들이 굴러다니고 이들 집들 위로는 쓸모 없는 쓰레기들이 높이 쌓여있습니다. 이 작은 지역은 '이'와 '바퀴벌레', '쥐', '약물', '알코올', '에이즈', '유행병' 들이 만연하고 끊임없이 싸움은 계속됩니다.

못 믿으시겠지만, 사실 이러한 뉴욕의 뒤 구석의 모습들도 예수님 당시의 이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살던 지저분한 모습과 비교한다면 왕궁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장애 연금도 없었고, 복지금도 없었으며, 무료 식권이나 병원 치료도 없었고 사회적으로 보장받는 것이라곤 사실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회에서 전적으로 버려진 것이었지요.

이들은 집도 없는 부랑자들이었고, 마을 밖의 고립된 지역에서 살도록 강요받았던 것입니다. 문둥병자들은 법적으로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게서 100보 이상 떨어져있어야 했는데, 혹시라도 사람들이 옆으로 지나가게 되면, 그들은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소리질러야 했습니다.

또, 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문둥병에 걸렸었는가에 따라, 어떤 이들은 손가락, 발가락, 귀, 치아, 손, 코 등을 잃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의 살은 벗겨져서 썩어 들어가고, 그 악취와 참혹한 광경은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구걸하기도 하고 때로는 쓰레기더미를 뒤적이기도 하면서 보통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못할 음식들을 먹었고, 사람들이 먹다 버린 음식찌꺼기에 의지해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버림받은 자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그들이 제사장에 의해 문둥병자로 선언되자마자, 두고 떠나와야 했던 그들의 사랑하는 가족들에 대한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아내와 웃음과 그들과 함께 뛰어 놀던 귀여운 아이들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집과 직업과 명예를 잃었고, 누구에게나 필요한 사람이 되고자했던 그들의 희망을 잃었습니다. 아마 그들 중에 몇 명은 신실한 유대인으로 그들의 신앙과 전통을 준수하던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이름도 모를 마을의 외곽에 천막을 치고 살아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슬픔에 싸여 처량하고 쓸쓸한 삶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문둥병은 언제나 죄의 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성경은 문둥병자를 부끄러움 가운데 사는 죄인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죄악의 무서운 영향으로 나날이 쇠약해지고 악화된다고 소개되지요.

이곳 타임 스퀘어 교회의 여러 예배 때에 보면, 앞에서 세 줄은 전에 이런 "문둥병자"와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들로 채워집니다. 이들은 전에 약물 중독이나 알코올 중독에 걸린 적이 있는 사람들을 재활 하는 "디모데의 집" (Timothy House) 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죄악의 문둥병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가졌던 것들 중 많은 부분을 잃게 합니다. 아내, 아이들, 직업, 자존심, 건강, 정신을 쉽게 잃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거리의 부랑자가 되어 기댈 곳 없는 거지 신세로 전락되기도 합니다.

이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에 대해 듣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떠돌이 문둥병자를 만나 예수님이 다른 도시와 마을에서 문둥병자들에게 행하신 기적 같은 치유들에 대해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곳을 지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예수님을 보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 상상을 해보십시오. 그들은 될 수 있는 한, 길과 가까운 곳에 모여 앉았겠지만, 그래도 정결 규정상 정상인들과 6, 7백 미터 거리를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나타나시기만을 기다리면서 그 자리에서 밤을 지새웠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쌍한 모습들입니까?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지저분하고, 살이 썩어 들어가서 이제 거의 죽게된 열 명의 병자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앉아 예수님이 지나가시기만 처량히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저는 가끔 이 문둥병자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오는 것을 보고, 어떻게 했을까 궁금합니다. 그들의 썩어져 가는 팔을 흔들어 댔을까요? 아니면 이들이 병으로 문드러진 팔다리를 가리켜 보였을까요? 아니면, 그들의 더러운 거적때기를 흔들어 댔을까요? 저는 이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관심을 끌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이들을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오셨을 때 "주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그들은 돈을 구한 것도 아니고, 죽은 후에 천국에 가게 해달라고 조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불쌍히 여겨 주소서" 소리를 질렀을 뿐입니다. 마치 "예수여, 저희들의 이 불쌍한 모습을 보고 그냥 가시렵니까,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지 마시옵소서!" 부르짖는 것과 같았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처참한 모습에 잠시라도 질겁하시거나, 얼굴을 돌려버리지 않으셨으리 라고 확신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시고, 이들의 모습에 아픔을 느끼시면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눅17:14) 고 말씀하셨습니다.

자,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이들 문둥병자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아니, 제사장에게 다시 가보라고? 제사장은 우리의 몸을 검사해보고 우리에게 "부정하다"고 선언을 내린 사람 아닌가! 그가 우리를 부정하다고 마을에서 쫓아냈었는데... 아마 우리 열 명이 모두 돌아간 다면 보자마자 우리를 무슨 염치로 다시 왔느냐고 박대할게 뻔한데... 문둥병이 나아서 돌아온 사람은 이제껏 없었으니, 우리보고 분명 미쳤다고 할거야".

그러나 순간적으로 어떤 생명력, 강건함, 그리고 힘의 물결이 이들 열 명 가운데 임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은 몇 달 동안 못쓰던 팔을 움직이기 시작하고, 또 한 사람은 그의 몸 안에 다시금 생명이 고동침을 느꼈을 것입니다. 한 사람 또 한 사람, 그들은 자신들의 문드러졌던 손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얼굴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의 딱지 져서 회색 빛이던 살갗이 바뀌기 시작하고, 건강해 보이는 살들이 그들의 팔 다리와 얼굴에 돋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문둥병은 낫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을 불쌍히 여기셨던 그 순간을 기억하십니까? 그 순간에 느꼈던 그 정결함과 생동감을 기억하십니까?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깨끗케 하시는 그 능력을 느끼면서 기쁨으로 소리지르지는 않으셨던가요? 새 생명이 여러분 가운데 시작되었음을 느끼시지 않았습니까?

이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이 생명을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이들 가운데 어떤 전율 같은 것이 흘렀으며, 기쁨에 겨워 소리를 질렀을 것이 분명합니다. 껍질이 벗겨져 썩어 들어가던 살들은 아물고, 문드러졌던 자리는 새살이 돋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 열 명의 문둥병자들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누가복음 5장 14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다른 문둥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자, 위 구절과 같이, 열 명중에 어느 문둥병자도 그냥 그들의 집이나 교회 또는 율법에 명한 권리들로 곧 바로 복귀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이 해야할 일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문둥병자가 낫게되면, 그는 먼저 제사장으로부터 "정결해졌다"는 선언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8 일간의 무척 까다롭고 복잡한 의식을 수반합니다. 먼저 그는 온몸의 털을 깎고 목욕을 한 후에 검사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는 희생 제사를 하면서 피를 뿌리고 기름을 몸에 바르는 정결의 과정이 따르고, 이어서 기름 바름과 속죄예물을 드리는 단계가 계속됩니다. 이런 모든 과정이 끝나면, 그가 자신의 가족들을 만나고 일상의 권리들을 되찾기 전에 또 8 일간을 기다리게 됩니다(재발여부 확인). 모두 합하면, 이 엄청난 종교적인 의식에 모두 16일이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까다로운 종교적인 의식들은 모두 '메시아의 영광'에 대해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사용되었던 상징적인 것들입니다. 이것은 레위기 14장에 잘 설명되어져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이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곧바로 앞을 다투어 달려갔던 이유였지요.

자, 이들 문둥병자들이 제사장에게 향하고 있을 때, 아마 예수님은 제자들과 요기를 하시고, 마을에서 무척 멀리 떨어진 길을 가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 뒤에서 웬 소리가 들렸습니다. 뒤를 돌아보자, 예수님과 제자들을 향해서 누군가가 손을 흔들고 소리를 지르며 뛰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제자 중에 한 사람이 그를 알아보고 말을 합니다. "저 사람은 아까 마을에서 보았던 열 명의 문둥병자들 중에 하나입니다." 가까이 온 이 사람은 "영광이 있을 찌어다, 예수에게 영광 있을 찌어다, 당신을 찬양합니다!!" 소리질렀습니다.

그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예수께 나아온 그는, 예수 앞에 굽혀 경배하고, 찬양과 감사를 돌려 드렸습니다. 이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향한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찬양이었습니다. "당신은 정녕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라면 이러한 일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 17:17) 예수님은, "왜 너뿐이냐? 나음을 입은 너의 친구들은 어디에 있느냐" 묻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아직도 묻고 계신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깨끗케 하시고, 온전케 하신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오직 몇 명만이 그 분께 돌아옵니다. 자, 그럼 나머지들은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제가 지금 그들이 어디 있는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들은 아까 제사장에게 달려갔던 9명의 문둥병자들과 같은 곳에 있습니다. '종교의식'에 사로잡혀 교회 안에서 길을 잃은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 나온 통계가 정확하다고 믿습니다. 이 누가복음의 통계대로라면, 예수님에 의해서 치유함을 받은 자들 중 90%는 영적으로 죽고 메말라버린 교회로 돌아갑니다. 그들은 결코 예수님께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교 안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자, 이들 아홉 명의 문둥병자들은 그들의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자, 나는 나의 아내와 가족에게 돌아갈 꺼야. 나는 나의 자존심을 되찾길 원해. 나는 회당으로 다시 돌아갈 꺼야, 그리고 앞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 공부해야지..."

아마,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게 뭐가 잘못되었단 말입니까? 한 남자가 자신의 가족을 부양하도록 명함 받지 않았습니까? 다윗이 그의 시편에서 하나님의 깊은 섭리들을 묵상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 마땅히 해야할 일들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다는 말입니까? 아니, 그리고 여기 아홉 명의 문둥병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대로 바로 제사장에게로 갔지 않습니까? 도대체 뭐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까?"

예, 모두 맞습니다. 그러나 먼저 명심해야 할 것은, '여러분들이 먼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이 모든 것들은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 아홉 명의 문둥병자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능력에 대한 증인들이 된 것입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눅 5:14). 이들 문둥병자들은 이제 몇 년 동안은 그들의 병을 치유 받았다는 능력 있는 간증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예수님께서 몇 마디의 말만으로 그들의 병을 고치셨다는 사실을 간증하는 것으로 그들의 남은 인생을 보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한때 문둥병자였습니다. 나는 이 병으로부터 낫게 될 소망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버려지고 말았습니다. 더럽고, 불결하고, 버림받은,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더니, 나를 깨끗케 해 주셨습니다. 나는 이렇게 건강한 몸으로 벌써 25년째 살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자, 이 얼마나 멋진 간증입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말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전혀 모르는 구세주의 능력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과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분들에게 예수님께서 어떻게 생기신 분인지 어떤 삶을 사셨는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도 그분의 마음을 알 수도 없습니다 !

제가 수년간 사역을 하면서 느끼는 가장 큰 슬픔은 무서운 죄와 범법을 행하던 삶에서 기적적으로 구원을 받았던 약물 중독자들, 알콜 중독자들이 다시 방황에 빠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 중에 많은 수가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전 미국의 교회들과 목회자들이 계속해서 그 엄청난 간증들을 듣고자 그들을 모시기에 바빴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그 추하고 무시무시한 과거에 대해 상세하게 간증하도록 부추김을 받고 고무되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지금, 이들 중에 대부분은 아직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5년 전 저는 창녀촌의 포주였습니다. 나는 창녀들과 어울려 살았고, 그러다가 감옥에도 20번이나 들락날락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내게 예수에 대해 이야기했고, 나는 깨끗함을 받고, 온전함을 입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께 돌아온 수백 명의 소중한 영혼들이 지금 힘을 잃었고, 다시 타락하였으며, 삶이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삶에 예수를 닮은 것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과거의 그 단 한번의 경험에 의존하여 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결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타임 스퀘어 교회'는 야외 전도 집회에서 개종한 사람들이 나와서 매주 간증하는 시간이 없느냐고 묻습니다. 사실, 이들 중에는 정말 여러분들이 결코 들어보지 못한 엄청난 간증들을 가진 형제, 자매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오래되어 닳아버린 그들의 간증이야기에 의지해 살기보다 더 큰 것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예수와 함께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께서 그들에게 '오늘'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매일 매일의 신선한 일들을 간증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삶 가운데 그리스도를 더 소유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수많은 개종자들, 구원받은 영혼들이 현실에 안주하고, 현대 기독교의 과대 선전 안에서 갈 바를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예 주님과 함께 동행하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죽은 종교를 더 좋아합니다. 그들은 그 "고등 종교의식"들의 형식주의와 허식을 즐기고 있습니다

아마, 그 아홉 명의 문둥병자들은 그 장기간의 정결 의례를 통과하면서 그들이 얼마나 종교적인가 자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사실, 그 모든 과정이 얼마나 대단한 의식입니까?

보세요. 먼저, 제사장이 두 마리의 새를 취하여, 흐르는 물위에서 잡고, 피가 물위로 떨어지게 합니다. 그리고는 우슬초를 백향목 패들 (약 40 cm) 에 묶어서 이를 진홍색의 실과 함께 살아있는 새를 향해 흔듭니다. 그리고 이 새의 날개와 꼬리를 피와 물에 담그게 됩니다.

이 피는 깨끗해진 문둥병자의 이마와 손목에 일곱 번 뿌립니다. 그리고 나서 그 살아있는 새는 공중에 날려 보내줍니다. 이제, 문둥병자는 자신의 옷을 빨고, 그의 모든 털을 밀고 몸을 씻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진안에 들어 올 수가 있었지만, 아직 7일 동안은 장막 밖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제 팔 일에, 그는 두 마리의 숫양과 한 마리의 흠 없는 암양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돌아옵니다. 그는 또한 2.8 갤론의 밀가루와 반 리터 정도의 기름을 가져와야 합니다. 이들은 속건죄와 속죄죄 또 번제를 위한 것입니다.

제사장은 이 오일을 자신의 손바닥에 붓고, 땅에 일곱 번 뿌립니다. 그리고는 양에서는 피를 취하여 정결하게 된 자의 오른쪽 귓부리와 우편 엄지손가락과 우편 엄지발가락에 바릅니다. 이제 제사장은 오일을 앞에 세 부위에 다시 바르고, 남은 기름을 그의 머리에 붓습니다.

이 얼마나 의식적인 행위들입니까? 이 문둥병자들도 자신들이 무척 종교적이라고 느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기름을 바르고 붓고, 피를 뿌리는 정결 의식들은 몇 가지 무척 중요한 것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안의 의미를 빼고 나면 이것은 모두 죽은 의식에 불과합니다.

이 문둥병자들은 예수님에 치유하심을 받고 왔지만, 다시 죽은 의식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다시 자존심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다시 교회의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다시 물질적인 기복신앙으로 돌아갔습니다. 결국 이들은 결코 주님을 다시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이들을 이러한 형식주의로 돌려보냈습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이들을 돌려보내신 이유는 이 의식들 배후에 있는 실재를 알게 됨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배고픔을 얻기를 바라셨다고 생각합니다.

정결 의식을 행할 때 그 앞에 "흐르던 물" -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의 물'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피를 뿌림" - 예수님께서 '내가 피를 흘리며, 십자가에 달리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죽임 당한 어린양" -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여러분, 이스라엘에는 이러한 제의들 각각의 의미들을 이들 아홉 명의 문둥병자들에게 설명해주는 제사장은 없었습니다. 결국 문둥병자들은 이 제의들을 기계적으로 행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 문둥병자들이 당신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의를 통해서 그들이 무엇인가 배우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부를 때에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모든 진리를 가지신 분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이것을 갈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아홉 명의 문둥병자들은 오늘날 교회에 앉아서 자신들조차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목회자들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수많은 가난한 영혼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영혼은 메마름과 지겨움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다행인 것은 사람들이 점점 이런 신앙생활에 싫증을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니, 예수님께서 나를 이렇게 자리에 앉아서 그저 뭔가 아는 것처럼 시늉만 하는 목자 밑에서 메말라 죽으라고 나를 구원하셨다는 말인가? 나에게 진실을 보여달라. 나에게 예수를 달라 !"

자 이제 제가 '열 명중에 한 명', 가던 길을 돌이켜 예수께로 달려왔던 그 남은 한 사람에 대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왜 매 세대마다 열정과 감사를 가지고 예수님께로 달려오는 한 사람이 있을 까요? 왜 하나님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저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자 돌아오는 자를 주목하시는 걸까요? 나머지 90%는 계속해서 형식과 복잡한 절차를 통과하고 있는데요.

저는 그 사마리아인이 형식과 제의들에 묶여있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로 돌아왔다고 믿습니다. 그는 사실 그 모든 형식을 버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른 아홉 명은 '정통' 유대인으로 자라왔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어린 시절부터 제의와 예식에 길들여졌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그 전통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이 이 모든 종교적인 예식을 보았을 때, 그는 소리쳤습니다, "이게 아니야!!"

그는 종교적인 지도자들과 예배 참석자들의 허식을 보았습니다. 그는 바리새인들이 과부들에게서 부당하게 돈을 빼앗고, 그들의 집을 가로채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제사장들이 뇌물을 주고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집을 도둑의 소굴로 만드는 환전상들이 성전에 가득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율법사들이 일반 백성들을 위해서 법을 만들지만 자신들은 조금도 지키지 않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는 위선자들, 겉만 번지러한 철면피들, 이중 인격자들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리고 자신에게 말합니다. "이건 꼭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꼴이군! 이건 내게 도움이 안 돼, 내겐 뭔가 진정한 것이 필요해!"

이 사마리아인은 다른 아홉 명과 함께 마을로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제사장에게로, 교회로, 사회로, 인간의 존엄성으로, 행복한 삶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그는 걸음을 멈추고 생각합니다. "잠깐만! 과거에 내가 이 모든 것들을 소유했을 때를 기억해보자. 내가 돈과 명예와 안정을 다 소유했을 때, 내가 행복했던가? 괴로움과 고통의 연속이 아니었던가? 그 아끼던 친구들도 '내가 문둥병에 걸린 것 같다'는 한마디에 모두 고개를 돌렸지 않은가? 나의 삶은 죄악 된 습성들에 젖어 있었고, 마음속엔 미움과 쓴 뿌리가 가득했어. 나의 삶은 공허했고, 생지옥과 같았어. 왜 내가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는 그의 마음속에 무엇인가 불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자, 나 자신을 봐. 이젠 난 깨끗해. 예수님께서 고쳐주셨어. 교회에 가보는 것, 잠시 늦출 수 있지 않은가? 나의 가족들은 날 언제나 기다려 주었는걸. 그리고 새로운 삶도 좀 미루어 두자. 지금은 예수님께로 가야해. 난 나를 고쳐주신 분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겠어!" 그는 결국 이제까지 역사 속에서 모든 마지막에 남은 자들이 얻었던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저 쪽에는 내가 원하는 것이 전혀 없어! 그저 허상일 뿐이지! 나는 예수님께로 가겠어. 그분이 바로 나의 실상(reality)이 되실 분이시거든"

이 치유 받은 사마리아인 문둥병자가 잠시 예수님께 감사하고자 돌아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의 마음은 자신을 고쳐주신 바로 그 분, 예수님께 경배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온통 가득 찼던 것입니다.

그 남은 한 사람의 문둥병자는, "영광!" 그의 중심에서 솟아나는 찬양을 결코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의 발 앞에 달려와 엎드려, 온 맘과 힘을 다해 소리 높여 감사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만일 누군가 여기 이 사마리아인처럼 예수님께 경배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분명 결코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작정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누구에게 간단 말인가? 이 예수님이야말로 나를 영생으로 인도하실 분이 아니신가!"

저는 이 사마리아인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다니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예수께서 산으로 가시든 해변으로 가시든 거기 모인 무리의 맨 앞에 그 깨끗함을 받은 사마리아인이 앉아있습니다. 그는 외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예수님! 하나님께 영광을! 당신을 찬양합니다!" 저는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그가 외치는 소리를 듣는 듯 합니다. "예수여, 나를 같이 데려가소서!" 그리고, 저는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에 충만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그의 모습 또한 상상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이 감사로 가득한 문둥병자가 절대 갖지 않았던 것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인류가 알지 못했던 잠재적 능력입니다.

매 4년마다, 1월이 되면, 미국에서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정부의 수장인 미국 대통령의 취임이 있습니다. 그의 서명은 곧 법이며,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통솔하며, 그가 그저 버튼 하나를 누름으로서 모든 나라들을 파괴시킬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능력도 예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주신 능력에 비한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 계신 창조주 하나님께로 나아가고, 또 그분이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절대적인 통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 11:19-22).

그 한 명의 문둥병자는 이런 능력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 능력은 성전의 휘장이 둘로 갈라진 후에 온 것이니까요.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기 위해 나아오실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의 "담력" 이란 말은 "활짝 열어, 숨김없이 드러냄으로"의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드러냄"은 마귀들의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마귀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또 하나님께서 내게 오시는 특권을 얻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만나기 위해 기꺼이 나아오시는' 이 특권을 가지고 있음을 믿으십니까? 자, 여러분, 이제 믿음의 확신으로 가득 찬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새나 염소나 황소의 피를 가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님의 피를 가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 9:12-14).

하나님의 자녀가 겁내지 아니하고 담대함으로 하나님께 나가는 그 순간만큼 하나님의 마음을 감격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나아와 "나는 여기에 있을 자격이 있습니다. 만일 나의 마음이 나를 정죄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보다 크십니다!" (요 3:20 참조).

이 사마리아인 문둥병자가 두 번째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성경은 예수님께서 "그를 온전케 만드셨다"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눅 17:19). 이때는 예수님께서 그에게 병에서의 치유 이상의 것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의 몸과 마음, 정신과 영혼까지 온전케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도 하나님께서 당신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 온전함!

저는 이 한 명의 사마리아인 문둥병자가 고향으로 돌아가서 그와 함께 깨끗함을 입은 아홉 명의 친구들을 만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 그들이 과연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요!

아마 아홉 명은 모여서 그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그들이 맞이해야 했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아내들은 다른 이와 결혼했고, 아이들은 부끄러움에 이들을 모른척했으며 오랜 친구들은 아직도 그들을 이방인 취급하였습니다. 다시금 정상인의 생활에 적응하기란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막 돌아온 이 사마리아인 친구를 바라봅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자네는 우리의 병을 고쳐준 갈리리 사람 예수를 아직 기억하는가? 도대체 그분에게 어떤 일이 생긴 거지? 아니, 그리고 자네는 왜 이렇게 행복한가?"

그는 슬며시 웃음을 지으며 말합니다. "난 예수님과 어제도 같이 있었다네. 난 이제 그분을 따르고 있지. 난 그분의 제자고 그분이 바로 나의 선생님이시라구. 난 자네들처럼 새 삶에 적응하느라 문제를 겪은 적도 없고, 나의 가족들이 나를 모른다해도 또 내 친구들이 나를 버려도 내겐 별 문제가 아니네. 예수님께서 나를 받아 주셨는걸!"

"여보게 형제들, 내가 그 비밀을 알려 줄까? 난 하나님과 동행한다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고 나에게 할 바를 가르쳐주시지. 난 지금 '천막 만드는 사람'이지만... 내가 가장 원하는 일은 나의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라네!"

아마 그는 그 나머지 아홉 명에게 그와 같이 예수님께 가보자고 초청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마 그를 실망시켰을 것입니다. "미안하네, 우리는 요즘 일주일에 3일은 율법공부를 해야해. 아, 요즘 우리는 그 '메시아'가 언제쯤 오실지에 대해서 중대한 논의를 하고있는 중이라서 같이 갈 수 없겠는걸." 그들은 그들이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이미 그분을 놓여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제 그 한 명의 사마리아인은 다시 떠나갑니다.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그는 노래를 부르며 갑니다. "내 마음에는 한 노래가 있어요. 그 노래는 천사도 부를 수 없는 노래랍니다. 구원받았네! 구원받았네!" 그는 그를 온전케 하고 자유케 하는 구원을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이 한 명의 문둥병자 보다도 더 커다란 것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저 열린 문만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이리 오렴, 너는 깨끗케 되었단다. 이것을 믿고, 담대히 살려무나. 이리 와서 그리스도를 만나거라!"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