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돔에서 나오라

나는 어느 목사님이 성도들에게 이렇게 설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구약의 말씀은 우리 시대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구약은 이제 연구할 가치가 없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내가 구약의 말씀을 사모하며 읽는 이유 중의 한가지는 구약이 신약의 진리를 명확하고 간단한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이야기들은 실존 인물들의 현실 생활에서 펼쳐진 영원한 진리의 상징과 그림자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약의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인의 상징입니다. 애굽은 세상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영적인 노동을 의미합니다. 또한 마라에서 쓴 물을 달게 만들었던 나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하며 사막에서 모세가 물이 흘러나오게 했던 바위는 십자가에서 고통받았던 우리의 구원자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이스라엘이 실제적으로 겪은 전투가 오늘날 우리의 영적 전투의 거울이 된다는 것을 성경은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린도전서 10:11). 성소와 그 기물들조차도 하늘의 모형입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히브리서 8:5).

이 모든 구약의 예들은 이스라엘처럼 우리들이 불신앙 가운데로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브리서 4:11). 다른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구약을 연구하고 이스라엘의 예를 보고 배우라. 그들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말아라!

나는 신약의 진리를 이해할 수 없을 때마다 구약을 펴서 그 진리가 어떤 방식으로 예시되어 있는지를 찾아봅니다. 예를 들어 사단이 나의 삶 속에 세워 놓은 영적인 담을 무너뜨리는 법을 배우기 원한다고 해 봅시다. 나는 여호수아의 이야기를 펴서 어떻게 그가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렸는지를 보겠습니다.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리는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전쟁을 통해서 나는 내가 그리스도안에서의 충만함을 얻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모든 벽들을 무너뜨리는 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모형을 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로 충만해지는 법을 배우기 원한다면 나는 야곱의 이야기를 펴서 그가 어떻게 천사와 씨름하였는가를 볼 것입니다. 목사로서의 기름 부으심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지를 배우고 싶을 때는 삼손의 이야기를 읽으며 어떻게 그가 기름 부으심을 잃었는지를 볼 것입니다.

이러한 식으로 소돔의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를 깨닫게 해 주는 강력한 본이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기록하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베드로후서 2:6).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소돔을 멸하게 하신 데는 한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그 성읍이 모든 사회에 교훈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돔이 예시하는 신약의 진리를 발견하기 위하여 소돔의 이야기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19장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조카였던 롯의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롯을 의로운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베드로후서 2:7-8). 그러나 롯은 그가 있어서는 안될 곳, 사악한 소돔성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소돔성은 악하고 폭력적이며 삐뚤어지고 불경건한 모든 것을 연상시킵니다. 그 도시의 죄악은 너무나 부도덕하고 사악하여서 그 악취가 하늘에 닿았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으로 족하구나! 이 성의 죄가 하늘에 닿았다. 이제 내가 소돔성을 완전히 불태워버리겠다(소돔의 히브리어 원 뜻은 검게 탄, 불에 탄 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소돔성이라고 하면 현대의 사악한 도시들을 떠올립니다. 공공연히 자신들의 합리성을 주장하는 동성애자들로 가득한 샌프란시스코, 탐심과 폭력으로 얼룩진 뉴욕, 사탄적인 참회의 화요일을(Mardi Gras)을 개최하는 뉴올리온스 등등 말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소돔성을 찾기 위해서 우리가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 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소돔성과 같은 성품, 지극히 사악하며 온갖 악으로 가득찬 마음을 타고 났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의 강포를 달아 주는도다(시편 58:2). 그 마음에 패역을 품으며 항상 악을 꾀하여 다툼을 일으키는 자라(잠언 6:14).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18절).

예수님께서도 우리들 안에 태어나면서부터 소돔성과 같은 성품이 있음을 언급하셨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 15:19-20).

이러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롯을 의로운 자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롯은 깊은 영적인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소돔에 묶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 타락한 도시는 그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롯은 자신의 영혼이 계속해서 썩어감에도 불구하고 그 도시의 속박을 끊고 나오지 못했습니다.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베드로후서 2:8).

롯은 소돔에 남아있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편 1:1). 롯은 결정했어야 했습니다. 그래, 나는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더 오래 있을수록 이곳의 죄악이 나를 사로잡을 거야. 나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내 영혼의 파멸! 그러나 그에게는 그런 의지력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에게 적어도 한번 떠날 기회를 주셨습니다. 창세기 14장에서 우리는 여러 나라의 왕들이 연합하여 소돔과 고모라를 침공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소돔과 고모라를 약탈하고 사람들을 인질로 잡아갔습니다. 롯과 그의 가족도 포로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14:12).

아브라함이 그 전쟁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그의 318 종들을 무장시켜서 그 침략자들을 쫓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경이로운 능력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은 그 모든 열왕들을 몰아내고 모든 것들을 원래대로 복구하였습니다.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 왔더라(16절).

롯은 소돔으로부터 초자연적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악한 도시를 떠나기는 커녕, 그는 곧장 그리로 되돌아 갔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였던 고인이 된 내 친구 레오나르드 라벤힐은 '소돔엔 성경이 없었다'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정말로 소돔에는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도시는 인류에게 전해졌던 어떤 설교보다도 가장 강력한 설교 중 하나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 설교는 바로 의를 나타내는 경건한 자, 아브라함입니다.

소돔의 백성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경배하고, 십일조를 드리며 하나님앞에 겸손하게 행하는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소돔을 구해준 것으로 인해 소돔성 백성들이 주려고 했던 모든 것들을 그가 거절했을 때 그 거절은 그들의 사악한 삶에 대한 일종의 사랑의 책망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으로부터 신발끈하나 받지 않으려 했습니다(23절)!

이 경건한 사람의 본은 롯을 통해서 강하게 전달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습니다. 롯은 여전히 소돔성을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종종 궁금해하곤 합니다. 왜 롯은 떠나지 않았을까? 성경은 그가 하나님을 사랑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분명 그 자신도 자신의 영혼을 염려하고 있는데.

나는 이 대목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가지를 지목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그 논지는 바로 어떠한 사람도, 아브라함과 같은 경건한 설교자라 할지라도 우리 마음의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소돔으로부터 건져낼 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육신은 완전한 구원을 이룰 능력이 그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롯은 오늘날 일종의 고분분투하는 그리스도인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신앙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영혼은 사회와 그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죄로 인해 고통을 당합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에는 무언인가가 남아 있습니다. 아마도 어떤 악한 버릇이나 끊이지 않는 악한 생각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 죄의 삯은 사망이니라. 정말로 율법은 계속해서 이 신앙인의 순종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계속해서 그의 마음을 정죄합니다. 그가 무언가 잘못할 때마다 율법은 소리칩니다. 또 죄졌군!

이런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그런 죄로부터 벗어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반복해서 나중에는 고칠거라고, 좋아질거라고 하나님께 약속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자신의 죄악에 굴복하고 맙니다. 그리고는 끝내 이렇게 외치고 맙니다. 나는 완전히 묶였어요. 나는 이것을 극복할 힘이 없어요. 그는 자신을 소돔에서 건져낼 수 없습니다!

구약의 율법 하에서는 절대적인 순종이 요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아주 경미한 불순종도 결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범죄한 자는 죽었습니다.

그러한 계명들은 명백하게 드러나 있었으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완전한 순종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율법은 그러한 순종을 육체가운데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율법은 완전히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그 율법을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사도행전 15:10)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또한 그 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라디아서 3:24). 율법은 우리의 마음을 드러내며 우리가 약한 의지력의 소유자이며, 어린 아기처럼 무기력하고 구원자를 필요로 하는 자임을 가르쳐 줍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지도 모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시면서 그럴 수 있는 능력을 주시지 않지? 성경은 이 질문에 명확히 대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죄악으로부터 벗어날 아무 힘도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야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그들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배우는데 400년이라는 고난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노예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구원자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땅으로 내려오셔서 그들을 속박으로부터 구원해 줄 하나님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스가랴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기까지 여러 세기가 걸렸습니다. 그들은 마침에 사면에서 불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스가랴 2:5) 되어줄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이스라엘 백성의 불성곽이 되어주시며 그들 가운데 영광이 되어주시려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이러한 교훈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아래 살고 있습니다. 육체로만 노력하며, 하나님께 계속해서 새로운 약속을 하고, 죄로부터 스스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매일 아침 일어나서 결전의 날이 왔습니다, 주님! 저는 이 모든 쇠사슬을 끊을 힘과 의지를 찾으려 합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저는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니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것은 더 큰 죄책감으로 결론지어질 뿐입니다. 율법은 그러한 것들을 십자가로 인도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무기력함을 인정하고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말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평안하게 생각할 자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나와는 상관없습니다. 나에게는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죄가 없습니다. 나는 간음, 우상숭배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나는 술, 담배도 하지 않습니다. 할렐루야! 제 안에는 소돔성의 성품을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러하다면 얼마나 큰 착각에 빠져 있는지요! 야고보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야고보서 1:14). 우리 모두는 우리의 욕심에 이끌려 미혹을 받습니다. 우리 모두, 예외가 없습니다!

야고보는 그 뒤에 다음과 같이 덧붙였습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15절) 그는 여기에서 탄생의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에는 욕심의 샘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짓는 모든 죄는 바로 이 샘에서 생겨납니다. 두 아기가 전혀 같을 수 없는 것처럼 두 가지의 죄도 전혀 같지 않습니다. 각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죄를 생산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의 비밀스런 죄에 익숙해지고 편안해 집니다. 롯처럼 그들은 죄에 눈멀어 죄를 가볍게 보게 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지체가운데서 보았던 그런 수많은 예들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 받고자 하는 죄를 간과합니다. 우리는 지위에 대한 욕심을 부리는 죄를 경히 여깁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뿌리, 우리의 성경 지식, 우리의 지속적인 기도생활에 대한 자기자랑의 죄를 못 본 체 합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을 겸손하고 친절하며 가르침을 잘 받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떠한 죄도 결코 경히 여기지 않으십니다. 나는 이것을 혹독하게 경험했습니다. 요즈음 지난 50여년간의 저의 사역을 되돌아 볼 때마다 나는 자만심의 죄로 속았던 때가 아주 지긋지긋합니다.

나는 어느 목회자 수련회에서 저 스스로를 특별한 설교자로 인식했던 때를 기억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주 특별한 계시로 축복하셨어. 나는 여기 참석한 어떤 유명인사의 설교에도 감동이 되지 않아. 하나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특별히 기름부은 설교자로 택하셨어!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결국 성령의 조명하심 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빛은 직접 저의 자만심을 비추었습니다. 내가 만약 이전의 것들을 뒤에 놓으라는 바울의 권고를 듣지 않았다면 나는 절망감에 휩싸이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비를 제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주님께서 제게 그의 은혜와 인내를 베풀어 주신 것에 감사 드립니다.

지금도 제 마음은 외치고 있습니다. 주님, 저는 제가 제 스스로 생각했던 것 같은 겸손하고 겸허한 목회자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나는 지금까지 잘난 체 했으며, 자신감에 넘쳐 있었습니다. 이제 나는 제게 있는 어떠한 기름부으심도 당신의 인자하심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의 욕심은 여러분의 욕심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소돔에서 구원받기 원한다면 우리 모두가 해야만 하는 세 가지가 있다고 믿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창세기 18:20).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비, 은혜, 오래 참으심 등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머지않아 주님께서 소돔성을 닮은 모든 것들을 대적하시려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성품을 모세에게 이렇게 드러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애굽기 34:6-7). 그러나 바로 다음 구절에서 하나님은 덧붙이시기를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7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는 죄를 간과하지 않겠다! 그래, 나는 자비롭고 오래참는 자이다. 그러나 너희들에 죄에 대한 나의 인내가 끝날 때가 다가오고 있다. 그 때 소돔은 불타 없어질 것이다!

롯은 이러한 경고를 받았습니다. 두 천사가 그에게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가로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창세기 19:15).

우리는 롯이 이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 롯은 너무 깊이 잠이 들어서 그 다음날 아침 천사들이 그를 깨워야만 했습니다. 롯의 사위들은 틀림없이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장인께서 진정 이 경고를 믿고 계신다면 지금쯤 이곳을 빠져나가고 계셨을 거야. 장인은 그 경고를 믿고 있지 않아. 그런데 왜 우리가 그걸 믿어야 하지? 우리 모두는 이것을 큰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에 관해서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곧 다시 오실 것처럼 살지 않는다면 아무도 우리의 말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 주님의 최후통첩이라고 하는 말을 믿습니다. 최후통첩은 여러분의 죄가 여러분을 파멸로 인도할 것을 성령께서 아실 때 일어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비밀스런 욕심이 불꽃처럼 폭발하듯 일어나기 전에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오셔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은혜의 하나님이다. 나는 너를 이것으로부터 구원하기 원한다. 지금 너의 죄로부터 돌이키라. 내 말에 순종하라!

이러한 최후통첩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께 거짓말을 함으로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 것을 경고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거짓말을 했을 때 그들은 쓰러져 죽었습니다(사도행전 5장). 이와 같이 바울은 성령을 근심시키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에베소서 4:30).

여러분이 얼마나 기도와 금식을 하든지, 여러분이 얼마나 성실히 주의 일을 열심히 하는지는 이것과 별개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죄가 여러분 자신의 욕심으로부터 잉태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죄를 진지하게 다루실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롯의 최후 심판일이 마침내 이르렀습니다. 거친 남색 폭도들이 그의 집을 에워 싸고 문을 쾅쾅 두드리며 외설적인 말들을 내뱉었습니다. 그들은 롯에게 두 천사를 내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두 천사를 강간하려 했던 것입니다.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창세기 19:5).

아주 무시무시한 광경입니다. 그러나 롯의 반응은 그들과 타협할 방법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롯은 성문에 앉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소돔의 재판관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자신의 명성에 해를 입히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폭도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가 소돔의 죄를 얼마나 경히 여겼는지를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컨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말라(7-8절).

어느 신학자는 그들이 동성애자들이기 때문에 자기 딸을 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롯이 알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롯은 이 사람들은 동성애자들인데 지금 분위기가 아주 들떠있어. 자기들의 삐뚤어진 정욕을 채우기를 기대하고 있지. 그들은 여자를 해하지 않아. 내 딸을 지금 밖으로 내보내더라도 내일 아침이면 무사히 집으로 돌아 올거야라고 나름대로 머리를 썼던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사실이 그렇다 해도, 롯은 하나의 죄를 다른 죄로 대치시키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욕과 타협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욕의 한계를 설정하려 할 때마다 그것은 항상 터져 나와서 그 한계 밖으로 퍼져나갈 것입니다.

롯은 의로운 자에게 숨겨진 죄가 어떤 작용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 입니다. 그는 분명히 미혹되었습니다. 그의 죄는 너무나 위험한 상황을 만들었고 그는 자칫 사랑하는 가족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잃을 지경에 놓였습니다. 단지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만약 일이 잘되면 나의 딸들과 내 명성까지도 지킬 수 있어. 모든 것이 이전과 같을 거야. 소돔에서의 생활도 결코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거야!

이 사람은 결코 현실을 직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잔머리를 굴리면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지연시키며 자신에게 닥쳐올 심판의 순간을 질질 끌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그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입니다. 그들은 나의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셔. 그는 전에도 나의 죄로부터 나를 구원하셨어.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실거야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롯의 이야기를 통해서 더 이상 타협하지 말아라. 더 이상 가벼운 죄나 무거운 죄를 반복하지 말아라. 그 모든 것을 버리라고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롯은 하나님께서 직접 손을 쓰시지 않았다면 소돔성의 심판 때 죽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문자 그대로 롯과 그의 가족을 직접 그분의 손으로 붙드셔서 소돔성 밖으로 끌어내셨습니다.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천사들을 말함)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창 19:16).

신약의 은혜를 얼마나 영광스럽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롯이 소돔성의 멸망 직전에까지도 지체하며 스스로를 구원할 아무 힘과 의지도 없자 하나님께서 직접 이 혼동과 미혹과 죄에 갇힌 자를 안전한 곳으로 그의 손을 사용하셔서 인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실상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네가 이 재앙과 더불어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 롯, 너는 의로운 자이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경고하였다. 이제 그곳을 떠나거라!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로마서 5:6). 여기서 연약하다는 말씀의 문자적인 뜻은 능력이나 의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롯에게 한가지를 더 지시하셨습니다.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창 19:17). 여기서 산은 하나님이 계신 곳, 하나님과 단 둘이서 만 있을 수 있는 곳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이 상징을 성경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은 산에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변화하셨던 것도, 기도 가운데 아버지를 찾으셨던 것도 산에서였습니다. 이 모든 일이 산에서 일어났습니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리로다(시편 48:1).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이사야 2:3). 이 말씀들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믿음으로 여러분을 구원하실 때 곧장 그의 거룩한 산으로 달려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롯은 여전히 주님이 계신 곳으로 달려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는 "내가 도망하여 산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창 19:19)라고 말했습니다. 도리어 그는 하나님께 가까운 소알성으로 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롯은 결국에는 산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산에 머무르자 소돔보다 더 악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롯은 술취했으며 자신의 두 딸에게 미혹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 롯과의 근친상간으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얼마나 비극적인 광경입니까! 이 모든 것은 롯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비록 구원은 받았으나 하나님의 충만함 가운데로 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다음의 말씀이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소돔에서 구해주시는지를 드러내주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3-4).

하나님은 미혹되고 묶여있는 상황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완전한 구원이라고 하는 강력한 약속으로 다가오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구원하고 죄로부터 지켜주겠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순종할 마음을 네게 주겠다. 자, 나의 약속이 너를 사로잡게 하거라!

얼마나 멋지고,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면 우리는 죄로부터 구속받게 됩니다. 잠시 묵상해 보십시오. 베드로는 편지에서 자신이 편지를 쓰고 있는 성도들이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했다(4절)고 말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죄를 피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신령한 능력, 즉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을 완전히 알기 원하십니다. 그 기쁨은 오직 여러분이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될 때 만 터져 나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여러분의 정욕 한가운데 들어가셔서 그리스도를 닮지 않은 모든 것을 제해버리시도록 하십시오. 바로 지금 이렇게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오, 하나님, 저는 죄에 대해 주님과 같이 생각합니다. 죄와 타협한 악취가 하늘에까지 닿았습니다. 저는 그것이 즉시 없어져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주님, 당신의 사랑스러운, 신령한 최후통첩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제 안에 있는 모든 악한 것들을 태워주소서. 주님의 약속이 저의 마음을 주장하여 주소서. 나를 당신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여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