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처한 곤경은 그 어느 하나도 자기 스스로 구원하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고난에서 해방하시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과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노예 신세에서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를 보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린도전서 10장 11절).
이스라엘에게 일어났던 모든 것들-노예생활, 시련 및 애급에서의 해방-은 오늘의 우리들을 위해 주어진 그들의 민족적인 간증이요 본보기입니다.
주님은 일찍이 모세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출애급기 3장 7-8절)
하나님의 말씀은 여기서 분명합니다. “내가 그 우고를 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이 말씀도 만약 위로가 될 수 없다면 그 어떤 위로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인즉 이렇습니다. “네가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내가 잘 안다. 그러나 이것 하나를 분명히 하자. 이 전쟁이 네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대 마귀는 네게 너무 강해서 내가 내려가서 너를 구원해주어야만 한단다.”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내가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출애급기 6장 6-8절).
여러분 할 수 있는 대로 다해보세요-꿈꾸며 치밀하게 계획세우며 조종하면서까지 해보지만 끝내 하나님이, “전쟁은 내게 속한 것이야”라는 말씀밖에 듣지 못할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맞서 싸울 때 외친 말이 있습니다.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사무엘상 17장 47절).
다윗은 문제를 자기 손에 쥐고 있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를 악물고 견디어서 한번 내 힘만 가지고 해야 되겠다”고 다윗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천만에! 그는 그 전쟁이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편 71절). 나처럼 당신도 갸우뚱 하며 “이게 도대체 무슨 신학이람. 고난당하는 것이 정말로 유익할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고난이라는 히브리어의 의미를 보면 “천해짐, 징계, 훼손, 상처, 낮아짐, 쇠약해짐, 우울증”으로 쓰였습니다. 이런 의미를 여기에 다 집어넣어 말들 만들어보면 이렇게 됩니다. “징계 받고 낮아지고 쇠약해지고 우울증에 빠질 정도로 고난을 당하고 보니 도리어 내게 유익이 된 이유는 주의 율례를 내가 바로 고난 때문에 배우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율레란 “새겨진 계명”입니다. 따라서 시편기자는 자기가 고난을 당해보니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법과 도리를 자기 가슴에 새겨주시더라고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보기 위해 고난이 닥치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본래 고난의 주된 목적은 그 고난을 통해 우리가 주 앞에서 인생길을 바르게 걷도록 가르치시려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시 34편 19절). 이 시편의 기록자에 의하면 우리가 무엇을 고난으로부터 배우느냐가 고난이 우리에게 있어야할 이유입니다.
우리교회의 아프리카선교사부부중 하나가 사역하는 나라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해왔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인 이곳에 설상가상으로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오래 된 상황입니다. 그들 부부는 최근 이웃나라의 기독교신자들 일행과 함께 준비한 트럭을 타고 함께 그 지역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국경을 넘어 생활용품들을 나누어준 뒤 그날 밤 집회에 참석하려고 떠났습니다. 국경을 5마일쯤 남겨놓고 트럭의 속도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트럭운전자가 가속페달을 밑바닥까지 깊숙이 밟아보았지만 속도는 계속 죽어만 갔습니다. 일행은 앞서 달리던 차가 멀리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모두 낙담했습니다.
마침내 겨우 국경에 도달하긴 했는데 이제 더 이상 차가 움직이지 못하고 완전 정지하고 된 것입니다. 다들 한마디씩 했습니다. “주님, 어떻게 된 겁니까?” 그런데 갑자기 국경수비대원들이 흥분해서 부산을 떨기 시작했습니다. “국경 너머 저편 여기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폭파사건이 터졌다! 조금 전에 여길 지나간 바로 그 차가 적의 잠복조에게 공격을 받아 박살이 났다 한다!” 그 단기 선교팀 일행은 그 차가 자기네들 바로 앞서서 국경 쪽으로 사라져갔던 그때 그 차량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약 자기네들 트럭이 이상 없이 잘 달려주었더라면 그들 역시 함께 변을 당했을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 다음 날 그 일행 중 트럭 운전자가 시동을 걸어보려고 자동차 점화키를 꽂아 돌리자 시동이 아무 문제없이 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나머지 여행길에 트럭은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제서 그들은 말썽처럼 보였던 악조건조차 하나님이 역이용하셔서 자기 계획대로 모든 것을 이루셨음을 깨닫게 되었음을 증거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구주 예수님은 현재 영광중에 거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살아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이지만 육체, 뼈, 머리칼, 두 눈을 다 가지고 계시지요. 우리가 비록 이 땅에 살고 있지만 그분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이 사실을 성경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라디아서 4장 6절).
그런데 이 세상에는 또 다른 영도 역사하고 있지요-적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을 우리에게 준 것과 똑같이 이 세상에도 적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서 죄의 화신인 그 어느 인간이 출현하기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 준비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한일서 4장 3절). 사도요한은 말합니다.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설교나 교육을 이미 들은 바대로 잘 알겠지만, 사랑하는 이들이여, 이제 깨어나시오. 이제 그 적그리스도의 영이 세상에 벌써 와있습니다요!”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적그리스도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다기보다는 그의 영이 이미 신비하게 역사하여 세상과 타협하는 심령들로 싸늘하게 바꾸어놓는 것입니다. 마침내 그가 나타나 그 모습을 공식적으로 드러내게 될 때에는 세상은 그를 영접하려고 준비된 세상일 것이며 사람들은 이미 그에게 마음을 빼앗긴 상태가 될 것입니다.
지금도 보면 점증하는 안티기독교 정서가 만만치 않은데 조만간 사회의 주된 흐름이 되고 바다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적그리스도의 영은 지금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배도를 일삼도록 그 마음을 침범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물으시겠죠? “기독교인들이 적그리스도는 믿어 뭘 하게?” 그러나 그들의 사고방식이 적그리스도화 되어가는 것을 보면 분명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미 기록하였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한일서 2장 15-18절).
사도요한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세상을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면 적그리스도의 영에게 마음 문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라고... 이 시대를 향하여 그는 계속 경고하는 듯합니다. “이 시대가 마지막 시대라는 증거는 이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탐욕스런 적그리스도의 영으로 가득 찬 것을 보면 알지요.”
“ 징계가 당시에는 즐겁지 않고 슬픈 것 같으나 후에 그로 인하여 훈련된 자들에게는 화평한 의의 열매를 맺느니라” (히브리서 12:11)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우리 마음과 더불어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그 분 자신도 유쾌하기는커녕 통탄하시고 가슴 아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심판에 들어갈 때는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며 그의 자녀들 위에 맴 돕니다. 그 분은 슬픔이나 회개의 아주 작은 표시라도 찾으시고 그런 것을 하나라도 눈치채시면 그 징계를 완화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싶은 생각으로 간절하십니다. “ 이제 그만. 너를 벌주는 것이 나를 너무 아프게 하는구나”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은 하나님의 고통을 이해 해야만 합니다. 다른 이들이 당신에게 상처를 주려고 할 때, 당신은 당신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오 주님, 제가 저에게 상처를 주고자 하는 저의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게 해주세요”
하나님은 가장 사악하고, 거리의 극악한 죄인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신다면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 당신에게 원수가 된 크리스천들은 얼마나 더 사랑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당신은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과 얼마나 먼 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마음을 알려면 정말 멀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 분께서는 악한자가 망하는 것도, 자신의 자녀를 징계하는 것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반대로 그것은 하나님을 끔직하게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지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의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자비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 이다 “(미가서 7:18-19)
우리 모두를 그토록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감사 드리세요. 그 분께서는 자비를 기뻐하십니다!
바울은 위태한 때에도 요동치 않는 사람들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거룩한 남은 자들을 적그리스도의 영에 대항하여 일어날 것이며 강경할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세상과 세속적인 것 그리고 사악한 것들을 이겨낼 것입니다!
“ 우리가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께 항상 감사를 드림이 마땅함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시어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너희가 배운 바 유전들을 지키라……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가운데서 영원한 위로와 선한 소망을 주신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말과 일에 너희를 견고케 해 주시기를 바라노라” (데살로니가 후서 2:13-17).
이 거룩한 남은자는 진리를 사랑하고 견책 받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빛 가운데 자신들을 살피고 말씀이 그 골수까지도 찌르기를 원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일 당신이 당신의 마음을 진리를 향해 활짝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을 계속하신다면 주님께서는 당신을 견고히세우실 것입니다.
“ 주를 신뢰하는 자들은 시온 산과 같아서 요동치 아니하며 영원히 거하는 도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같이 주께서는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토록 두르시리로다. 악인의 막대기가 의인의 구역에 머물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으로 죄악에 손에 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시편 125:1-3).
적 그리스도의 영은 위엄을 상징하는 회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능력과 통치는 당신을 이겨내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남은 자의 일원이기 때문입니다.
“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굳세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며 너희가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이라” (요한일서 2:14)
“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라” (요한일서 5:4)
적그리스도의 영이 온다 한들 당신은 요동치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견고히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집에서 순전한 심령으로 경배할때,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향한 모든 적들을 이겨 낼 것입니다.
하나님의 “곱절의 아픔”은 우리가 그 분의 임재 안에서 주님의 빛과 사랑을 거역하며 죄를 지을 때 처음으로 보여집니다. 그 죄 자체가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죄로 인해 어떤 결과가 따라오는지를 아시는 그 사실이 그 분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가 우리를 슬픔과 비참함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의 두 번째 “곱절의 아픔”은 우리의 죄가 주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심판 해야만 하는 자신의 말씀을 지킬 것을 강요할 때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거룩한 성품을 만들어내시고자, 사랑의 아버지로 곁에 계시며 징계로 고통가운데 울부짖는 우리를 들으십니다.
제게는 인생의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적이 있었습니다. 저를 비방하는 말들이 퍼지기 시작한지 한참이 지속된 후, 저는 하나님께 그분의 말씀을 상기시켜드리기 시작했습니다.
-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 하는 자도 피하지 못하리라” (잠언 19:9)
- “거짓말하는 사는 사악한 혀에 귀를 기울이느니라”(잠언 17:4)
얼마 후에 저는 절망가운데 부르짖었습니다. “오 하나님, 당신께서는 얼마나 더 이 일이 계속되게 놔 두실 건가요? 거짓말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기에 어디서 오는 지 조자 알 수가 없어요. 주님, 주님은 저의 변호사이시고 당신의 백성의 억울함을 갚아주신다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당신의 어떤 공의의 일도 볼 수가 없어요.”
저는 저에 대한 모든 비방들을 생각하면서 궁지에 몰려있는 다른 목사님들과 주님의 종들을 떠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자신들을 향해 던져진 악한 말들 때문에 끔직한 시련을 겪고 있는 의로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 주님, 이유가 무엇인가요?” 저는 기도했습니다. “ 주님께서는 왜 당신의 백성들이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십니까?”
주님께서 대답해 주셨습니다. “데이빗, 나는 자비롭고, 오래 참으며 노하기를 더디 한단다. 왜냐하면 나의 공의대로 하자면 그것이 나를 너무 아프게 하기 때문이란다. 만일 네가 나의 아픔을 느낄 수 있다면 나의 공의가 행사되기를 너는 결코 절대 바라지 않게 될 거야. 너는 내가 왜 그것이 행사되어지기를 그렇게 오래 기다리는지 이해 하게 될 거야. 너도 너의 자녀들을 훈육시키는 것이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인지 알고 있지. 나도 마찬 가지란다. 내가 사랑하는 자들을 징벌한다는 것이 나를 고통스럽게 한단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 가라, 너는 내려가라! 이는 네가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온 네 백성이 부패하였음이라….그들이 주조한 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에다 경배하며 거기에다 희생 제를 바치며… 내가 이 백성들을 보았더니, 보라,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러므로 이제 나대로 하게 하라. 그들에 대한 내 진노가 맹렬해져서 나로 그들을 진멸하게 하라” (출애굽기 32:7-10)
“모세가 주 그의 하나님께 간구하여 말씀 드리기를 “주여, 주께서 위대하신 능력과 능하신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신 주의 백성에 대하여 어찌하여 주의 진노가 맹렬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진노에서 돌이키시어 주의 백성을 향한 이 재앙에서 돌이키소서……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행하려고 계획하신 그 재앙에서 돌이키시니라. (11-14절)
이 구절들을 읽을 때,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보다 모세가 더 은혜와 자비가 많은 것으로 잘못 생각합니다. 그들은 “ 모세가 이스라엘을 향한 엄청난 긍휼함 때문에 간청하고 있고, 반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진실과는 다릅니다. 모세가 이처럼 기도할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이유는 모세는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람들이 진멸되기를 요구했지만,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멸하시려면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지를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이렇게 탄원을 올린 것입니다. “이 목이 굳은 백성들이 진멸되어야 한다고 당신의 공의가 부르짖고 있는 것을 저는 압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께서 만일 그렇게 했을 때 그 아픔을 견디실 수 없다는 것 도 알고요. 하나님,저는 당신의 마음을 알지요,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에 이스라엘을 멸하실 수 없다는 그 마음을요.”
성경은 하나님이 “ 돌이키셨다” 즉 그 분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심판할지에 관한 그 분의 마음을 바꾸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멸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백성들을 광야에서 맴돌게 하셨습니다. 백성들이 그들의 불신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삼십팔 년이나 더 아프게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여전히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죽는 날까지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처음 사도바울이 이신칭의 교리를 가르쳤을 때 초대 교회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충격이었습니다. 도대체 믿을 수 없는 교리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이에 대해, “내가 죄를 용서받았고 하나님은 자비하시고 또 나는 단지 믿음만으로도 계속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이니까 하나님이 내게 좀 더 큰 은혜를 베풀 수 있게스리 내가 좀 더 많이 죄를 져봐야겠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런 신학자들은 복음이 뭔지 잘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십자가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옛사람에 속한 모든 것은 끝난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도전적으로 질문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로마서 6장 1절). 그러면서 이내 “아니라’고 부정합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한 거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처럼 죄와 사망을 벗어난 기독교인이 무엇이 부족해서 썩어가는 송장이나 붙들고 부활 시키려고 하겠는가? 하나님이 모든 죄책과 정죄를 잠재우는 대신 안정과 평화를 보장하신다는데 무엇 때문에 죄악의 생활로 다시 돌아가려는가? 이제 십자가 때문에 당신은 주님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이라는 새로운 이름의 책임감이 생겨서 주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
“그럼 우리가 예수님의 의를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요?”라고 누가 물으시겠죠? 물론 절대적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걸어갈 신앙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완성한 일에만 우리의 믿음의 근거를 두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죽었고 우리안에 있는 새사람은 예수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그분께 두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전적으로 받아주십니다. 하나님의 눈에 우리는 그분의 귀한 아들의 품안에 안겨있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거나 실패할 때에는 언제든지 대신 나서줄 변호사 예수께 달려가시기를 바랍니다. 실패를 그분께 속히 아뢰고 그분의 의로움속에서 쉼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이런 질문을 하십니까? “아니 선행은 이신칭의의 이교리 안에 있을 자리가 전혀 없다는 말입니까?” 물론 있기야 있지요.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선행으로 말미암아 당신이 구원받거나 의로움이 인정되거나 하나님이 용납해주시거나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지요. 당신이 구원받을 조건으로 해야할 유일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과 그분이 이미 해놓은 일을 믿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해놓은 일이 그러면 무엇입니까? 당신을 구원했고, 용서했으며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가족의 일원으로 이미 영접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볼 때 예수 안에 있는 존재로만 보십니다. 여기엔 우리의 죄악과 실패와 모든 것이 포함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넘어질 때마다 우리의 구세주에게로 다시 나와야합니다. 우리가 처음 믿었을 때 우리를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하신 그 예수의 피는 그분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이르도록 계속해서 우리를 지켜줄 같은 피입니다.
이처럼 확고한 안전장치에 부과된 어떤 고매한 의무조항이 있다면 모든 좋은 일들을 할 때에 자기 힘을 의지하는 대신 주님의 능력과 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로마서 8장 13절).
우리가 처음 구원받았을 때 우리의 죄들을 용서받았단 사실을 우리 모두 의지했습니다. 주님도 우리를 영접했다고 믿었기에 우리는 모든 죄책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들을 믿는 믿음으로만 나는 구원 받았습니다.”
그 이후 예수님와 동행하며 살아온 믿음의 길에서 우리는 불순종의 죄들를 새롭게 저질렀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느새 십자가를 놓쳐버리고 죄로 인해 무너지지 십상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스스로 이루어보려고, 하나님의 환심을 다시 한번 사보려고 더 많는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악몽처럼 돌아가기만 하는 회전목마라도 탄 듯, 범죄한 뒤 고백하고 또 범죄하는 악순환을 되풀이 하게 됩니다.
때때로 우리는 좀 더 열심히 하면 구원을 획득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합니다. 육신적으로 조금만 더 개혁되어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텐데 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결과적으로 옛사람을 우리가 좀 더 멋지게 만들어 그것으로 승승장구 믿음의 행진을 하겠다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승리를 얻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어요. 엄청 힘든 것과 고통을 감내했답니다. 금식 기도도 했고 내 정욕과 죄스러운 욕망들을 버리는 성과도 있었습니다. 그런 순종을 위해 겪은 나의 온갖 어려움이 하나님께 아무 가치도 없단 말입니까? 의로움을 획득하기 위한 내 모든 노력이 정말로 하나님 앞에선 더러운 옷에 불과하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들은 육에 속한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단 한 가지 의로움밖에 없는데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의로움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 하였느니라”(로마서 10장 3절).
하나님의 좋으신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는 단 한 가지 길이 있다면 그것은 진리를 사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육신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좋은 일가지고는 내가 내 구원의 성적을 올릴 수가 없음을 잘 압니다. 내가 내 힘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로는 내가 조금도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나의 의로움은 단 한분 오직 예수안에만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의가 선물이라는 진리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로마서 5장 17절).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시한 바 있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린도전서 6장 9-10절).
사도는 이어서 말했습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 했습니다(11절).
어떻게 그런 끔찍한 죄를 저지른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 것일까요?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들이 이젠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고 하나님이 받아주신 걸까요?
첫째,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가진 직함이나 명예가 다 그분께는 하찮은 것입니다. 왕, 왕비, 대통령, 수상 그 무엇인들 중요치 않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그 어떤 술책에도 말려들지 않습니다. 길게 하는 기도, 금식, 십일조, 성경공부, 자선행위 등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이 우리를 좀 더 의롭게 보거나 또는 좀 더 잘 받아주시게 만드는 효과가 없습니다. 육신적으로 볼 때 우리의 좋은 장점들-예를 들어 좋은 성품, 언행심사, 품행-마저도 만약 우리가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할 근거로 제시한다면 하나님의 코에는 악취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로 걸어가셨을 때 그분은 육신에 속한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형으로 없애버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남은 상대는 오직 한 분이었습니다. 그 단 한사람 남은 아들만을 하나님은 상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마침내 이땅에서의 모든 일을 다 마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았을 때 하나님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단 한사람 의로운 사람만 상대할 것이다.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자마다 반드시 의로운 내 아들을 통해서 나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 의롭게 보일려면 다른 사람은 절대 안되고 내 아들 예수의 의로움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예수와 그분이 한 일을 믿는 믿음외에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실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한 말씀 그대로입니다(에베소서 1장 6절).
잘못했으면 그때마다 빨리 예수께 나아와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통회자복하면서 그분께 달려나가기 바랍니다. “예수님, 제가 또 주님의 이름을 더럽혔나이다! 저는 도저히 수습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 무슨 방법을 쓴다해도 당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서 저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을 알기에 주님을 통해 아버지께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받아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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